피재 - 건의령 - 황장산(1059m) - 댓재(강원 태백 - 삼척)
26.1㎞, 12시간 소요
이제는 정말 열성분자, 극렬분자만 남았다지만 열성파에 중독자들이라도 가끔은 지치기 마련이다. 선배 기수 완주자들의 경험담에 따르면 총 40차로 계획된 종주 일정 중 절반이 ‘꺾인’ 다음의 25~30차에 이르면 산도 지겹고 산행도 심드렁해지는 이른바 ‘권태기’가 온다고 한다. 남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무거운 배낭을 꾸려 터덜터덜 버스를 향해 가는 일이 새삼스레 괴로워진다. 달리는 버스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목적지에 도착해 잠이 덜 깬 상태로 어두운 산길을 밟아 나가고, 길섶에 쭈그려 앉은 채 식은 도시락을 먹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헤쳐 가는…. 이 모든 일이 참으로 부질없는 ‘미친 짓’ 같다는 회의감이 초반에 그랬듯 물밀어 드는 것이다.
코오롱등산학교의 이용대 교장이 쓴 ‘등산교본’에서는 반복되는 산행에 타성화가 되어 맥 빠진 느낌이 드는 ‘등산 권태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독도, 지형, 사진, 그림, 문학, 음악, 역사, 동식물 등 산과 연관된 여러 방면을 두루 탐구하면서 즐거움의 영역을 넓히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전설과 설화로 백두대간을 이해해 보자면, 오늘 산행 구간에 속한 구부시령(九夫侍嶺)에는 먼 옛날 고개 동쪽 한내리 마을에 살았다는 여인의 전설이 서려 있다. 어찌 된 운명의 장난인지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얻으면 또 죽어서 마침내 아홉(九) 서방(夫)을 섬겨야(侍)했던 여인을 기념(?)해 이름 붙여진 고개라는데, 전설 치고는 참으로 야릇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기구한 운명에 처하고서도 “남편 잡아먹는 년!”이라는 욕을 들었을 여인을 생각하면 비극이요, 전후좌우에 생략된 사정을 만약 여인이 남편을 몰래 살해해 갈아치웠다고 상상하면 엽기물이요, 앞의 이야기에 숨겨둔 정부(情夫)라도 등장할라치면 치정극이요, 사내들이 그처럼 쉽게 죽어나가는 상황이라면 전쟁이나 부역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 그로 치자면 사회극이다! 아아, 이 와중에도 나는 소설쟁이의 직업병으로 머릿속이 허벅지만큼이나 퍽퍽하다.
그런데 이번 산행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출발점인 피재의 휴게소에서 기르는 것으로 짐작되는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산행에 동참한 것이다. 생후 2~3개월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그 토종 믹스견(일명 똥개)은 낯선 사람들에게 겁도 없이 엉기며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스틱으로 밀고 발로 툭툭 차보아도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건의령까지만 함께하자!”며 강아지에게 ‘건이(건의의 변형)’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건의령을 지나 쫓아 보낸 녀석이 굳이 돌아와 일행이 흘린 김밥을 얻어먹고 아이들이 병뚜껑에 따라준 물을 얻어 마시며 끝끝내 갈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작고 여린 녀석들, 하지만 거친 산길 위에서 아이들과 건이 사이에 오가던 사랑은 그 무엇보다 크고 성숙했다. 아이들이 건이를 통해 힘들고 지루한 산행에 위로를 얻고 자기들보다 약한 존재를 보듬어 살피는 마음을 키웠다면, 건이는 아마도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교훈을 얻지 않았을까?
마침내 산행이 끝나고, 건이는 댓재의 휴게소에 맡겨졌다. 아이들은 잠깐의 정을 못 잊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런데 정작 건이는 휴게소 아주머니가 따라준 우유 한 잔에 혹해 아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시무룩한 아이들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삶 속에서는 만남도 사랑도 지나간다. 그리움도 믿음도 희망조차 지나간다. 하지만 그와 함께 고통도 지나간다. 상처와 절망도 지나간다. 사소하니까 지나갔겠지만, 지나니까 사소해진 것이기도 하다. 마침내 도착점에 다다라 욱신거리는 발을 등산화에서 꺼내어 슬리퍼에 우겨넣을 때,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토록 힘겨웠던 26㎞도 사소해진다. 그래도 세상은 살 가치가 있고, 사랑은 할 가치가 있고, 슬픔도 나름의 힘이 되듯이, 무수히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찬 삶도 나쁘지 않다. 아니, 지나간 만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