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9시간30분 소요
‘체력은 국력’이라는 오래된 표어가 있긴 하지만 체력은 나라의 힘이기 이전에 내 삶의 힘이다. 삶의 책임을 가뜬히 감당해내고 의무를 버티며 견디기 위해서는 마음만큼이나 몸을 잘 단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저질 체력’을 ‘무쇠 체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젠가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국제대회를 앞두고 맹훈련 중인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각 종목의 특수한 훈련을 할 때만이 아니라 윗몸일으키기나 역기 들기 같은 기초체력 훈련을 할 때에도 그들의 곁에는 어김없이 코치들이 한 명씩 붙어 서 있었다. 이미 땀범벅에 녹초가 되어 곧이라도 나가떨어질 듯한 선수들을 향해 코치들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이기도 하고 응원이기도 한 한마디를 외치고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더는 못할 듯한 한계에서 젖 먹던 힘까지 자아내어 역기를 들어 올리고 몸을 일으킨다. 그것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새롭게 얻어진 힘이다. 마지막 순간에 힘들다며 포기하고 나가떨어져서는 결코 알 수 없고 끝끝내 닿을 수 없는 신비다.
산행 시작 시간은 새벽 4시. 올 들어 처음 하는 야간 산행이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별이 도글도글한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저수령에서 옥녀봉까지 200여m는 줄곧 가파른 오르막이다. 그야말로 야간 산행 특유의 ‘눈에 뵈지 않는’ 상태에서 헐떡거리며 어둠을 헤쳐가노라니 모든 상념이 까맣게 지워지고 오직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만 몰두하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래서 노련한(혹은 노회한) 집행부는 야간 산행 구간으로 ‘눈 뜨고는’ 쉽게 견디기 어려운 곳을 잡는다.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몇 시인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허위허위 걷다 보면 어느새 정점이다. 밤새 시달리고도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먼 곳으로부터 서서히 동이 터온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지리산 종주에다 악명 높은 대야산의 수직 절벽까지 섭렵한 나름 노련(하다고 주장하고픈) 백두대간 종주 팀이 아닌가?! 있는 기운 없는 기운을 다 끌어내 바위를 뛰어넘고 기어오르고 건너가기는 하는데…힘이 부친다. 황장산을 넘어 4m 높이의 멧등바위를 로프로 내려올 때에는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거의 대롱대롱 매달려 미끄러졌다. 발을 서로 너무 가깝게 놓고 몸을 뒤로 충분히 누이지 못하는 전형적인 초보자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두려움, 그리고 몸의 유연성과 체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공중에서 겨우 내려와 땅을 딛고 보니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듯 후들거린다. 혼자 절뚝절뚝 걸으며 오늘의 패착이 무엇 때문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겨우내 우리가 너무 쉬운 지형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혹독한 겨울 날씨에 무리한 산행을 할 수 없었기에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고 암릉이나 로프가 없는 구간을 골라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체력과 함께 마음의 긴장이 흐너졌다.
오랜만에 새삼스럽게 쓰게 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지난 계절의 게으름을 소문낸다. 고작 몇 달을 조금 쉽게 지냈을 뿐인데, 맘은 속일 수 있어도 몸은 속이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너무 힘들어서) 자꾸만 꾀를 부리려는 선수들에게 코치들은 냉정하게 일갈했나 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을에서와 달리 산에서의 최고와 최선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며칠을 쉬어도 나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내게 설득당하고 나를 설득하며 산을 탄다. 명령도 지시도 내가 내리고, 응원도 격려도 내가 한다. 팔다리로 바위를 부둥켜안고 로프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양 옆이 낭떠러지인 돌길을 아슬아슬 건너오는 일을 어떻게 내가 아닌 누군가의 뜻에 의해 할 수 있겠는가? 작금에 들려오는 카이스트 이공계 영재들의 연쇄 자살 소식을 생각하면 헛된 경쟁과 서열주의에 대한 회의가 더하다.
아직 무르익은 봄은 아니지만 산은 새로운 계절의 기대로 수런수런하다. 삭정이 같이 마른 나뭇가지에도 봄눈이 돋고 구석구석 비밀처럼 꽃망울들이 맺히고 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땅은 새싹을 위해 가만히 양보를 하고 새싹은 아무러한 저항에도 분연하게 제 몸을 밀어 올린다. 지금은 비슷비슷하게 닮은 어린 것들, 생강나무 꽃과 산수유, 철쭉과 진달래도 다음번 산행 즈음에는 선명히 자기만의 꽃을 피워낼 것이다. 생강나무 꽃은 생강나무 꽃대로 산수유는 산수유대로, 철쭉은 철쭉대로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1등은 1등대로 꼴등은 꼴등대로 다 다른 꽃을 피워낼 것이다. 어두운 땅을 박차고 삶의 푸른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하며 목청껏 제 삶을 외치는, 아름다워서 다르고 달라서 아름다운 사랑이다.
죽음으로 도망치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을 살았던 어린 친구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더 이상 막다른 벽 앞에서 좌절해 쓰러지는 젊음이 없기를 바란다. 산에서는 오로지 나 자신이 경쟁자이자 지원군이듯,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쿵저러쿵 남의 삶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화 속의 금자씨처럼 친절하게 속삭여주면 된다.
“너나 잘 하세요!”
내 삶은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괜찮다. 우리는 그렇게 꽃필 수 있다.
사진 = 서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