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신문방송학과 전공) 후에도 작가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던 그는 당시 대학 등록금보다 비쌌던 시나리오 작가 아카데미(6개월 과정)에 등록했지만, 작가로서 활동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학생부군신위’ ‘칠수와 만수’를 썼던 지상학 작가의 권유로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 들어가게 됐다. 작가가 되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곳에서 ‘방자전’을 연출한 김대우 감독의 수업을 듣게 되면서 시나리오를 쓰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로 사는 법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그의 동기였던 ‘올드보이’ 황조윤, ‘주먹이 운다’ 전철홍도 이곳에서 배출된 작가들이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는 김 작가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망생 시절을 보냈다. 데뷔작 ‘인디안 썸머’ 이후 10년은 적응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기였다면, 이제는 작가가 되고 싶을 때부터 쓰고 싶었던, 다른 누군가에게도 작가의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쓸 생각인가.
“원래 관심 있던 장르는 판타지 장르다. 일본 드라마 중 ‘기묘한 이야기’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런 분위기의 글을 쓰려고 한다. 그렇다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처럼 기본 전제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신비한 체험을 가져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갑자기 무언가 빠지직 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작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그런 작은 경험을 극대화해서 작품으로 표현하는 거다. 지금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했다기보다는 주어진 것들을 처리하는 데 바쁘게 보냈다. 누구나 10년 이상을 한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처음에 무엇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마치 기술자처럼 빨리 계약하고 빨리 시나리오를 넘기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 집에 왜 왔니’를 개봉하고 두 번째로 봤을 때 더 이상 이렇게 쓰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대로 조용히 퇴출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은 어떤가.
“이렇게 선택받은 인생이 또 있을까 생각한다. 혼자 만들어 낸 공상을 멋진 배우들과 감독이 실현해 주니까. 한겨울 찬물에 들어가거나 위험한 액션을 하는 식으로 배우들은 목숨까지 걸고 영화를 찍는다. 영화 촬영 장소에 가면 정말 감동적이다. 현장에 가보면 큰 의미 부여를 두지 않고 쓴 한 줄에 배우들이 얼마나 고민하는지 모른다. 작가가 쓰고 나서도 잊어버렸던 대사 한 줄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해석을 해내려는 배우와 감독의 모습을 보면 미안하다. 심지어 말줄임표 속에 담긴 의미를 연기로 옮기려는 노력까지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시나리오 작가는 정말 보람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우리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의식주에 관계있는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도 아니니까. 얼마 전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일본인들이 트위터에 남긴 글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피해 지역에서 제일 필요한 것 3가지를 써놓았는데 첫째가 물, 둘째가 아기용품과 여성 생리용품, 그리고 셋째가 ‘노래’라는 글이었다. ‘인간에게 문화라는 건 정말 중요한 거구나’라고, 이것이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시나리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경험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 경험이 많은데 자기 것은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나한테 있었던 일은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특별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주 사소한 경험도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 같다. 내 곁에 있는 언니나 친구, 엄마, 우리 선생님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할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느 날 언니가 집에 들어와서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치자. 이때 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떻게 해야 하지? 우나? 아니면 뭘 보나?’ 언니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로 상황을 예측해보는 거다.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면 스토리가 생긴다.
‘임금은 무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인데, 작가야말로 뻔뻔해야 한다. 속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 스스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부끄러운 일은 안 하려고 한다.(웃음) 작가는 뭔가를 잘못했거나 치사하고 간사한 마음을 품었던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거짓말이라는 건 사람들이 나를 좋게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은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꾸미지 않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객들도 공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시나리오 작가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작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몇 군데 있긴 한데 사실 이 분야에서는 전공자를 우대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예를 들어 처음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한 사람은 설거지를 맡는다. 설거지부터 도마로 지위가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요리장이 아무리 잘 가르쳐 줘도 요리 실력이 늘 수 없다. 또 설거지 하는 사람은 요리장과 경쟁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도마를 맡는 사람과 경쟁하려고 할 때 안타깝다. ‘내가 언제 도마 단계에 올라갈 수 있지?’ ‘저 사람보다 도마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많다. 자신의 목표인 요리장(작가)을 보면서 실력을 닦아야 도마를 거쳐서 요리장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멀리뛰기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2m를 뛰려면 4m만큼 뛰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뛰라고. 누군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년생. 미국의 영화감독, 각본가, 배우, 음악가, 코미디언)이 되려고 해야 ‘김지혜’만큼 될 수 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