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봉 코스/ 왕복 10시간 소요
삶이 그러하듯 산은 불확정하다. 불확실하다. 불가해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비롯된 백두대간 종주는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을 거쳐 드디어 태백산을 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새벽 4시에 찾은 화방재는 전날 강원도 산간에 내린 폭설로 야간 산행이 불가능했다.
적설기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쳐 나아가며 길을 뚫는 일을 러셀(russel)이라고 한다. 은백색 눈의 카펫은 아름답지만 그 아래 어떤 지형이 숨어있을지, 눈의 성질은 어떨지를 알지 못하기에 위험하다. 러셀의 요령은 쌓인 눈이 무릎 이상으로 빠지는 경우 무릎으로 다진 다음 발을 딛고 평상시보다 보폭과 동작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지만, 에너지가 2~3배 더 소모되는 러셀을 하며 24㎞의 눈길을 헤쳐 간다는 건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럴 때 현명한 산꾼은 지체 없이 우회하거나 가던 길을 멈추고 탈출로로 내려와야 한다. 산이 주는 가장 큰 가르침 중 하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므로.
앞선 발걸음에 이끌려 갔던 눈밭을 되돌아오며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를 가만히 되뇐다.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가 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지니.
잡티 한 점 없는 순백의 벌판, 투명한 햇빛과 푸른 하늘, 나뭇가지마다 송이송이 활짝 핀 눈꽃들, 이국적인 풍광을 빚어내는 바람개비를 닮은 풍력발전기 그리고 그 커다란 날개에 부딪치는 깊고 부드러운 바람소리…. 3월의 끄트머리에서 맞닥뜨린 겨울 풍경은 깜짝 선물처럼 감격스럽다. 선자령을 넘어 동해 전망대까지 끝없이 펼쳐진 눈벌판에 설맹이라도 되어버릴 듯하지만 잠시도 이 황홀을 놓칠 수 없다.
동네 뒷산도 오르지 않는 평지형 인간으로 평생을 살았던 내가 마흔이 넘어 갑자기 백두대간 종주를 하겠노라고 나선 까닭에는 더 늦기 전 지금껏 꺼리던 일과 맞서보고 싶다, 아들과 함께 산행을 하며 돈보다 값진 추억을 물려주고 싶다, 운명의 삶터를 내 발로 밟아보고 싶다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밝히지 않은 한 가지 가외의 이유가 있었다. 고향인 강릉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 넘었던 고개들이 모두 백두대간에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그 고개들은 다만 산맥을 넘는 교통로가 아니었다.
영동과 영서의 교통로인 대관령, 미시령, 진부령, 한계령, 진고개, 구룡령 여섯 고개 중 가장 나지막한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 구절양장 같은 길을 감고 묵묵히 서 있는 그 고개는 가난한 변방의 사람들에게 유일한 출구이자 벽이었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그 벽을 넘어 탈출하고 싶어 했다. 뒷맛이 싸하고 들큼한 경월소주를 병나발 불며 언젠가는 그 벽을 넘어가고야 말겠노라 호기롭게 외치곤 했다. 술이 3분의 1쯤 남은 병을 가만히 흔들어 보면 소주는 동해 바다처럼 맑고 투명하게 흔들리고,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가득 찬 고도(孤島)의 우울과 광기도 차갑게 흔들리곤 했다.
-‘대관령’ 중에서
쉬엄쉬엄 왔는데도 6시간 30분 만에 코스를 주파한 일행은 여유작작하게 바닷가에 가서 회를 먹고 상경할 궁리까지 하며 하산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산은 끝끝내 기어이 기필코, 불확정하고 불확실하고 불가해하다. 본래 하산 코스로 생각했던 삼양목장이 구제역으로 인해 폐쇄되는 바람에 퇴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36명의 등반대는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완전히 고립됐다. 이렇게 황당하고 기막히고 어처구니없을 수가!
이제 ‘탈출’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계속 진행해 오대산 노인봉을 거쳐 진고개까지 가는 것과 왔던 길을 되짚어 대관령으로 돌아가는 것. 결국 우리는 ‘가장 쉽다’고 소문난 대관령 코스를 왕복하는 ‘가장 어려운’ 길을 택했다. 불만을 품고 불평을 터뜨리자면 한정이 없을 테지만, 우리는 이미 1년 동안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결코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봐주지 않는 냉정한 산에 길들여진 바 있다. 불평불만은 통하지 않는다. 후회와 한탄도 소용없다. 산이 돌아가라면, 돌아가는 수밖에.
되돌아가는 길은 맥 빠지고 힘들지만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벗어나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다리쉼 할 여유도 없다. 다만 어금니를 악물고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다. 몸과 맘이 괴로우니 아무리 아름다운 풍광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좀 더 빨리 가기 위해 아이젠을 풀고 달리듯 걷다 보니 몇 번이나 얼음길에서 미끄러졌다. 그래도 엄부럭을 떨며 지체할 틈이 없다. 얼른 털고 일어나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달려 나간다.
하지만 오로지 걷는 일에 집중해 나아가다 보니 짜증과 심술로 들끓던 마음은 어느새 눅어들고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산행 코스는 ‘화방재-대관령-대관령’이네!”
아들아이는 이 황당무계한 상황에 꼭 맞는 블랙 유머를 던진다.
“엎치나 뒤치나 우리는 어차피 24㎞를 걸을 운명이었어!”
울지 않기 위해서는 웃어야 할지니, 나는 그저 이 잔인한 운명을 웃으며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래도 한 가지 오롯한 희망은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산행이라도 언젠가는 끝에 다다르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덧없는 불평불만 대신 팔다리를 열심히 놀려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뿐이다. 6시간 30분 만에 갔던 길을 3시간 30분 만에 돌아왔다. 어쨌거나 산에서나 삶에서나 ‘버리는’ 경험과 시간은 한순간도 없다.
사진 = 서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