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사는 삶이 행복해요

메트로폴리탄 도시 서울에서 마을살이가 가능할까. 그런 의구심을 해결해준 곳이 바로 서울 마포구 성산1동에 자리한 성미산마을이다. 인위적이고 계획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17년 전 의기투합해 만든 마을이라 더 주목받고 있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아이로 키우자는 공동육아 정신이 그 시작이었다. 어린이집과 학교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직접 마을살이에 필요한 시설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되살림가게, 생협과 유기농 반찬가게, 공동주택 등 의식주에 필요한 기반시설이 갖춰지면서 마을은 생활의 중심이 됐다.

새 봄을 맞는 성미산마을은 새 길을 낼 준비에 한창이다. 성산2동과 망원2동, 용강동 인근을 대상으로 마을 만들기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3월엔 마을금고도 문을 연다. 사회적 협동으로 호혜의 경제가 가능함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성미산마을의 진화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도시의 ‘대안마을’ 성미산마을, 그 현장을 찾았다.

9가구 입주하는

공동주택 3월 오픈

싸라기눈이 내리던 1월 31일 오후, 자전거도로가 잘 갖춰진 성산로를 따라 걸었다. 표지판은 예상대로 없었다. 인구 1000만의 거대도시 어디서나 만날 법한 흔한 동네. 하지만 마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미산 마을극장’이란 노란색 안내판을 뒤로한 채 골목길을 따라가니 왼편에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오는 3월 9가구가 입주하는 마을 공동주택 3호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민들이 건축기획 회사 ‘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 만들기(소행주)’를 세운 후 대지를 매입하고 입주민을 모집했다. 박흥섭 공동대표는 “입주민들이 직접 살고 싶은 집으로 평면을 설계했다”며 “방문이 아예 없거나 계단으로 연결된 복층집도 있다”고 했다. 건평도 16평부터 32평까지 다양하다. ‘따로 또 같이’ 공동주택의 모토다. 입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고 옥상에는 바비큐 요리장도 꾸몄다.

시민공간 나루 지하 2층에 있는 성미산마을극장에선 판타지 애니메이션 ‘코렐라인: 비밀의 문’을 보러 온 아이들로 북적댔다. 엄마, 아빠들도 친한 사이인 듯 인사하랴, 수다 떨랴 바빴다. 여드름이 잔뜩 난 이예빈(성미산학교 5학년)양은 “이동식 좌석이 편해 뒹굴뒹굴 구르며 볼 수 있어요”라며 환히 웃었다. 

성산로 길가에는 두레생협과 유기농 반찬가게 ‘동네부엌’, 성미산밥상 등 마을 기업들이 나란히 문을 열고 있었다.

동네부엌에서 50m쯤 올라가니 이레빌딩 2층에 성미산밥상이 자리해 있었다. ‘밥상을 차리는 이도, 밥상에서 숟가락을 드는 이도 즐거운 곳….’ 입구에 부착된 유리판 ‘출자자의 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요리사’ 김광근(43)씨는 “주민 90여 명이 출자해 지난해 4월 오픈했다”며 “우리 땅에서 난 친환경 재료만 쓴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이름 대신 별칭으로 불렀다. 사회적 직함이 서열을 만든다는 생각에서다. 경제와 교육, 문화활동이 마을에서 모두 이뤄진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486가구가 살다보니 “활동가들이 만든 공동체 아니냐”는 오해도 있지만 성미산마을은 자발적으로 형성됐다. 그 뿌리는 공동육아다. 1994년 신촌우리어린이집이 전국 최초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으로 문을 열었다. 2004년 12년제의 도시형 대안학교 성미산학교가 개교했다.

반찬가게, 친환경 식당…

밥상이 즐거워져

2001∼2003년 펼쳐진 성미산 싸움은 마을을 묶는 기폭제가 됐다. 주민들은 당시 자연 숲인 성미산을 깎아 배수지를 건설하겠다는 서울시에 맞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주민 반발에 밀려 착공을 연기하던 시가 산의 나무를 기습적으로 벌목할 땐 남자 어른들이 돌아가며 천막을 치고 밤새 산을 지켰다. 결국 ‘건설계획 유보 결정’을 이끌어냈다. 성미산 지키기 운동을 이끈 핵심 그룹이 공동육아 어린이집 부모와 생협 조합원들이었다.

주민들은 올해 학교법인 홍익학원과의 싸움이 마을을 더 탄탄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홍익대 부속 초중고 이전 공사는 주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창 진행 중이다. 문치웅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성미산 지역 대부분이 서울시가 구분한 비오톱(생명체들의 서식 공간) 등급 중 1등급에 해당된다”며 “생태 보전 가치가 높은 성미산을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미산마을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방문객도 부쩍 늘었다. 지난해에는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성공 비결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주민들은 “각개약진, 자가발전이 비결”이라고 했다. 유연한 협동 시스템을 갖췄다는 얘기다.

위성남 사람과마을 운영위원장은 “마을 ‘공동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하고 싶은 사람이 일하고, 필요할 때 만나 네트워크를 맺는” 느슨한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을사람들은 토박이가 아니다. 유목민이 우연히 정착민이 된 것”이라고 했다. “도시살이에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익명으로 존재한다. 성미산마을은 사람들의 관계망이다. 무엇보다 생활 인프라가 매력으로 작용했다. 마을엔 어린이집도, 학교도, 생협도 있다. 마을기업이 커뮤니티를 만든 강력한 힘이다.”

주민 수도 1세대마저 이야기가 다를 정도다.

“한 1000명쯤? 500∼600명 사는 성산1동이 가장 많고 서교동, 연남동, 망원동에 흩어져 있다.”(위성남 운영위원장) “어린이집과 성미산학교가 중심이다. 1500∼3000명가량 된다.”(유창복 성미산마을극장 대표)

마을기업 중심으로

여성 일자리 창출

마을에서 고용이 창출된 것 또한 매력이다. 특히 마을기업이 속속 생기면서 여성 일자리가 크게 늘었다.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마을에서 아이 키우고, 지역사회에서 일자리도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성미산 교장을 지낸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는 “승자독식의 시대에 이제 더 이상 건강한 아이는 마을 없이 자라나기 힘들다”고 했다.

“안전한 마을, 신뢰할 수 있는 어른, 변함없이 그곳에 있는 가게와 가게 주인들, 작은 공원과 늘 가는 반찬가게와 엄마가 가는 요가 교실, 그 옆에서 피아노를 연습하는 추억…. 마을은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책이나 시험 공부만이 아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부모들이 동네 호프집에 갔을 때 이웃집에 가서 함께 놀고 숙제도 서로 봐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관계 맺음의 형태다. 타운은 단순한 건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의 집합이다.”

이은희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은 “무한 개발과 성공 지상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성미산마을 같은 공동체의 실험은 사회적 위기를 일으킨 근본 가치에 도전하는 대안문화운동”이라고 말했다. 특히 성미산마을에서 엄마이며 주부인 여성들은 상당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마을 공동체의 기초 철학이 보살핌의 윤리에 기반하고 있고 이를 잘 실천해낼 수 있는 주체가 여성들이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돈벌이에 큰 욕심이 없다. 사람들의 수입은 천차만별이지만 80% 이상은 전셋집에 산다. 부부 합산 연봉이 3000만원도 채 안 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외부 간섭이 싫고, 자립적으로 마을 기업을 운영하려다 보니 출자가 많아졌을 뿐이다. 성미산 대안학교 수업료가 한 달 45만원이라 비싸다는 시선도 있지만 대신 학원에는 보내지 않는다. 소비의 가치 기준이 이들은 다르다.

명절 때나 귀향해야 만나는 존재 인 가족은 더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 이젠 사람들이 협동하고, 의지하며 사는 길밖에 없다. 혈연적 가족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의 관계가 필요하다.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성숙돼 가는 곳이 바로 진정한 ‘마을’이다.

마을에선 독신도 아이들과 이모로, 삼촌으로 어울리면서 관계를 맺는다. 아이들도 다양한 어른과 친하게 지내면서 삶과 미래를 생각하고 지혜로워진다.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맺고, 아지트를 만들고, 그런 아지트를 연결하는 허브에서 정보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간다. 성미산마을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는 절실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