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좋은 문학이라면 그 자체로서
페미니즘 문학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돼요

“전 이미 팔자가 곧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일이나 자식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팔자의 일부분일 뿐이에요”(1980년 작 ‘살아있는 날의 시작’ 중 일부).

문학평론가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1998년 ‘한국 문학의 현대적 해석- 박완서’(서강대 출판부)를 펴내면서 머리글에 “한국의 여성문학을 우리 문학사에서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게 된 것은 그와 박경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큰 잘못이 없겠다”고 말했다. 적어도 여성주의 시각에서 박완서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 해석은 지금도 유효하다.

“페미니즘 문학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좋은 문학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내 생각에 진짜로 좋은 문학이라면 그 자체로서 페미니즘 문학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돼요”

페미니즘 문학과 여성운동을 주제로 1987년 열린 또 하나의 문화 좌담회에서 박완서 자신이 한 말이다. 그는 여성신문 초대 주간이었던 시인 고정희와의 인터뷰(‘다시 살아있는 날의 지평에 서 있는 작가’, 한국문학, 1990.1)에서 “넌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공부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 한다. 그게 엄마의 소원이란다”란 말을  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았다. “신여성이 뭔데?”라고 묻는 그에게 어머니는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 이치에 대해 남자들처럼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을 낸다. 어머니의 신여성은 당시로선 “가장 팔자가 사나운 여자들”이라고.

이 “가장 팔자가 사나운 여자들”이 바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박완서 문학의 핵을 관통하는 주제들이다. 여성학자 박혜란은 박완서의 문학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해석한 “‘여자다움’의 껍질 벗기”(작가세계, 1991년 여름호)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1980년 발표된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박완서가 본격적으로 여성문제에 도전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다. 지방대 교수인 남편의 위선적인 일탈에 결국 이혼을 택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 대해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쓴 작품”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이후 ‘서 있는 여자’(1985),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를 수년 간격으로 발표했다. ‘서 있는 여자’는 대학교수의 아내와 딸이 가부장적 가장 밑에서 반항과 안주를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싱글 여성이 상대 남성의 이기적인 태도로 미혼모의 처지가 되고 아이까지 빼앗길 위기에서 이를 꿋꿋이 헤져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박혜란에 따르면 박완서는 그동안 소외됐던 중산층 고학력 주부의 삶을 여성해방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드문 시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현모양처로 충분히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주부들”에게 박완서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중산층 여성들의 지난한, 때론 피 흘리는 ‘껍질 벗기’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싶었을까. 이에 대해 박혜란은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일에 대한 모욕에 분노를 느끼는 여성”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이는 자신의 일을 가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권력관계가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지속되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내적 강인함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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