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그림 때문에 고뇌하던 모습 가여워”

 

장욱진 화백의 남다른 가족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인 ‘가족도’(1972). 왼편은 부인 이숙경씨고, 나머지 둘은 아이들이다. 장경수 씨는 “당시 형제들이 학비를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늘 ‘나는 그림 그리는 것 밖에 죄가 없다’고 했다. 자식입장에서는 너무 안쓰러운 말이었다”고 말했다.
장욱진 화백의 남다른 가족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인 ‘가족도’(1972). 왼편은 부인 이숙경씨고, 나머지 둘은 아이들이다. 장경수 씨는 “당시 형제들이 학비를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늘 ‘나는 그림 그리는 것 밖에 죄가 없다’고 했다. 자식입장에서는 너무 안쓰러운 말이었다”고 말했다.
고 장욱진 화백의 20주기를 맞아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장욱진(1918~90) 화백은 독특한 조형세계와 삶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한국 근현대 회화사의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자신이 자연과 더불어 단순하게 사는 삶을 추구했던 만큼 어린이, 가족, 나무, 새 등 일상적인 이미지를 소박하고 정감 있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 짓는 강박관념을 없애고,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접목할 수 있는 하나의 조형적인 가능성을 회화로 구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장욱진미술문화재단과 갤러리현대(대표 도형태) 공동 주최로 열리고 있는 이번 회고전 현장에서 1월 21일 장 화백의 장녀 장경수씨(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를 만났다. 장경수씨는 이날 아버지의 삶과 그림을 주제로 강연을 열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한 그인 만큼 세간의 관심도 뜨거웠다. 강연장은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장경수씨가 전하는 말을 따라 장욱진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구성했다.

“공모전 대상 실력에도 미술 성적은 저조해”

장욱진 화백은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국 규모의 소학생 미술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미술 실력이 처음부터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장경수씨는 “보통학교 시절 아버지의 미술 성적은 늘 ‘병’(丙, 십간의 셋째 순서, 요새로 치면 ‘미’)이었다. ‘똑같은 그림은 싫다’며 반기를 들었기에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의 성적밖에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가족도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할머니 몰래 숨어서 그림을 그렸고, 매를 맞으면서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더구나 그는 고등학교를 체육 특기생으로 졸업했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재학 당시 일본인 역사 교사가 한국 학생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한 것에 이의를 제기한 사건으로 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장경수씨는 “아버지는 ‘내가 빙상으로 서울예선을 통과했다’고 자랑하시거나 ‘양정고에 인물은 손기정과 나뿐’이라며 농을 치기도 했다. 만학도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그 때부터 술과 담배를 배웠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장 화백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된다. 편입이 결정되기 전 6개월간 수덕사 생활을 하면서 당시 신여성이었던 일엽 스님의 소개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또 양정고 시절에도 전국 규모 미전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화가의 꿈을 키운다. 장씨는 “아버지는 나혜석 화백이 자신의 그림을 두고 ‘간결한 어떤 것들은 네가 나보다 낫다’고 말했다고 했다. 공모전 상금으로 받은 100원으로 할머니의 비단옷을 맞춰주면서 할머니도 아버지의 그림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지원해주지는 않으셨으나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회상한다.

“그림 그리는 ‘죄인’ 아버지 대신해 생계는 어머니 몫”

장 화백은 광복 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근무하고,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한적한 시골(경기 덕소, 충북 수안보, 경기 신갈 등)에 화실을 마련해서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다. 그래서 가족은 항상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그는 늘 미안한 마음에 “나는 그림 그린 죄밖에는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부인 이순경씨는 혜화동에 서점 ‘동양서림’을 차려 운영하며 가장 대신 가족을 건사했다. 장경수씨는 “어머니의 존재로 가정이 존재했다. ‘동양서림’이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자매가 다 클 수 있었고 아버지가 생활전선의 부담을 벗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신명 하나로 그림 그리는 장인으로 살기를 고집했던 그를 세상의 눈은 기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린 딸의 눈에는 그런 아버지가 “가엾어”만 보였다. “당시 그 나이의 다른 아버지들은 사회적으로 안정이 돼 있고 모두 가족 부양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자식들이 한창 커 나갈 때라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꼭 필요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가끔 덕소에 가볼 때면 그런 생각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만 한 그림에도 엄청난 고뇌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안쓰러움과 가여움을 느꼈다”는 것.

작품 관련 에피소드들…“어머니는 ‘무제’를 싫어하셨다”

 

회고전 현장에서 만난 장욱진 화백의 맏딸 장경수씨.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prescription drug discount cards blog.nvcoin.com cialis trial coupon
회고전 현장에서 만난 장욱진 화백의 맏딸 장경수씨.
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
prescription drug discount cards blog.nvcoin.com cialis trial coupon
1963년작 ‘덕소풍경’은 장 화백의 추상적인 경향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작품이다. 1964년에는 제1회 개인전을 열고 ‘무제’ ‘눈’과 같은 초상화를 연이어 소개했다. 장경수씨는 “당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그리고 ‘너는 뭐냐 나는 뭐냐’라는 말만 중얼거리셨다. 이런 추상에 대한 사유 과정이 다시 자기 그림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고 훗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부인 이순경씨와의 일화가 담긴 작품들도 많다. 1970년작 ‘진진묘’는 ‘다른 화가들은 부인을 그리는데, 왜 나는 안 그리냐’고 이씨가 장 화백을 채근해서 나온 작품이다. 장경수씨는 “당시 아버지는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서 서울 집으로 와 있었는데 갑자기 중간에 덕소 작업장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완성한 작품을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않고 건넸다. 돌아와서는 심한 감기몸살에 시달리셨다. 어머니는 그 그림에서 나타난 자신이 마치 보살과 같다고 했다. 훗날 어머니의 법명이 진진묘가 됐다”고 회상했다.

1974년작 ‘무제’는 부인 이순경씨가 가장 싫어하는 작품이었다. 장경수씨는 “어머니는 ‘마치 관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싫어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전시회장에서 그림을 내리기 위해 내 남편이 그 작품을 사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신 작품이 우리 가정에서 소장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아버지의 작품이 됐다”며 웃었다. 

‘장욱진 20주기 회고전은 2월 27일까지(월요일 휴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입장료는 3000원이며,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문의 02-2287-3500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