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은 1990년대 초반, 미술학도로서 환기미술관에 가기 위해 처음 걷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꾸준히 환기미술관을 드나들게 되면서 부암동을 오갔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점은 ‘조용하고 외진 곳’이라는 것, 겨울엔 ‘참으로 추운 곳’이라는 인상이었다.
환기미술관을 드나들던 90년대 초반의 부암동엔 지금처럼 가게들이 별로 없었고 차 한 잔 마실 만한 곳도 없어서 전시를 보고 나와 출출해지면 근처의 동양방앗간에서 떡을 조금 사서 걸어 다니며 먹곤 했다. 겨울의 부암동은 예나 지금이나 유난히 추워 겨울에 산책을 할 때는 그 시절 부암동에서 거의 유일하게 식사가 가능했던 손만둣집에서 만둣국을 먹었다.
1999년 겨울 무렵부터 계동길에 살면서 계동 인근 위주로 산책을 다니다가 북촌에서 서촌지역으로 코스를 본격적으로 옮기게 된 때가 2000년 초반인데 그때야 비로소 ‘클럽에스프레소’라는 커피집이 생겼다.
클럽에스프레소 앞에 동양방앗간이 있다. 동양방앗간 왼쪽으로 내려가면 환기미술관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그 길 끝에 백석동천(백사실계곡)이 나온다. 백석동천에 가기 전 환기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본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이곳에선 자주 볼 수 있다. 천장이 높은 환기미술관에 들어서면 마치 성당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점점이 수없이 수행하듯 찍은 물감 자국이 있는 김환기 화백의 그림과 아무도 없는 아침의 성당 같은 공간 속에서 복잡 다난한 일상과 수많은 생각이 사라진다.
꿀 집 앞에 잠시 서서 속으로 ‘꿀꿀꿀’ 하면서 따라 읽고 있노라면 기분이 명랑해지고 재미있어진다. 그 기분을 데리고 동양방앗간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 그러니까 백석동천으로 향하는 길로 걷는다. 길을 걷다보면 높다란 담들이 중간 중간 없어지고 낮아지는 지점들이 있는데 한옥 형태의 카페가 나오면서부터다. 이 지점을 지나면서 북악산 전망도 잘 보이기 시작하고 군데군데 텃밭도 보인다.
어느 여름날에 그 길을 걷다가 마당에 빨래를 넌 뒤 의자에 앉아 쉰다는 것이 잠시 낮잠에 빠지신 듯한 그 댁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그 풍경이 난 매우 ‘부암동스러운 풍경’이라 생각했다.
그런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며 더욱 한적해진 마음으로 백석동천으로 향한다.
계곡 아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별장 터였다는 유적지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래서 백석동천은 백사실 계곡이라고도 불린다.
별장 터엔 연못 터도 있고 옛 건물의 초석으로 보이는 기둥들도 남아있어서 계곡의 풍경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은 말라버린 연못 터를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머릿속에 옛날 옛적 영화로운 시절을 보냈던 시간들 속 이곳의 풍경이 상상되곤 한다.
하루가 걸리지 않는 부암동 서울 여행. 심산유곡 한적한 곳으로 여행 다녀온 것처럼 마음은 고요하고 단순한 기쁨으로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