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잘조잘 일하면서 꿈 키워가요”

“가끔 손님들이 묻곤 한다. 여기는 뭐 하는 데냐고. 그러면 난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위급한 청소년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한 체험활동이라거나 청소녀들의 안전한 일자리를 위한 분식집으로 공부도 같이 한다고. 그러면 손님들이 ‘아~좋은 곳이구나’ 하곤 한다”(민이·20·가명).

마포구 서교동 화력발전소 부근 골목에 자리한 작은 분식집. 지난해 9월 문을 연 이 분식집은 이 동네에서 꽤 소문이 나있다. 라면, 주먹밥, 떡볶이 등 7~8개의 단순한 메뉴에 불과하지만 인공 조미료를 고집스럽게 안 쓰는 데다가 빨간 후드티셔츠를 입은 소녀들의 씩씩한 서비스가 저절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바로 서울시 늘푸른여성지원센터에서 가정폭력 성폭력 가출 등으로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위기 청소녀들의 자활을 위해 2009년 구상, 시 예산 5000만원을 지원받아 지난해 지하 차고를 개조해 9월에 개소식을 하고 11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 ‘조잘조잘 DIY 분식점 & 카페’다.

서울시 늘푸른여성지원센터 지원으로 지난해 9월 오픈

전국 지자체로선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십대 여성’만을 위한 자활터인 조잘조잘 분식집은 위기 청소년이 나날이 늘어가는 음울한 현실 한 편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잔잔히 보여준다. 

분식집 작명도 참여 청소녀들이 내부 회의를 통해 직접 지었다. 센터 윤혜린 소장은 “‘조잘조잘’이란 말 자체가 또래 혹은 선후배끼리의 수다를 통해 소통·치유·공감함으로써 힘을 얻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뜻하고, DIY(Do It Yourself)는 강한 자활 의지를 나타낸다”며 이들 청소녀들이 이런 여성주의적 콘셉트가 강한 작명을 한 것이 신기하고 대견스럽단다. 그렇다면 왜 분식집이란 업종을 택했을까.

윤 소장은 이번 작업을 함께 한 탈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여성성공센터 윙(W-ing)과 논의 끝에 “십대를 위한 자활 공간은 아이들이 요리를 직접 만들고 서빙하면서 손님들과 직접 만나는 등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분식집으로 업종을 정했다고 전한다.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분식집 참여 스태프들은 지난해 7월부터 지역 조사와 메뉴 개발에 돌입하고 윤 소장과 센터 직원들은 시장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윤 소장 자신도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한여름 찌는 더위에 센터 문 앞에서 1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가나 세어보았다. 그 결과 20대 여성이 가장 많고 점심 시간대가 가장 붐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경제적·심리적으로 자립해야 악순환 고리 끊어져

“그래서 경제적 자립과 심리적 자립은 실과 바늘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일단 이렇게 자립하고 나면 아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위기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되는 것이다.”

윤 소장 역시 청소녀들이 분식집에 근무하는 것이 언뜻 보면 그리 큰일이 아니지만 작게 또는 크게 아픔을 겪은 그들로서는 “매 순간이 자신의 성실성과의 싸움이며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설명한다.

“십대 청소녀를 위한 자활터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취약계층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이 성매매 등을 통해 10만원, 20만원 쉽게 벌 수 있는데도 여기서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으로 자립하려는 의지 자체가 소중하다고 본다. 상처를 파헤치는 것만이 치유가 아니라 앞으로의 자신의 야심찬 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가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과거의 나쁜 일들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 역시 중요하다.”    

첫 월급부터 20만원씩 붓는 500만원짜리 적금을 들었다는 몽이도 스스로 “아침형 인간으로 변했다”고 고백한다. 하루 12시간씩 불규칙하게 몰아 자곤 했지만 분식집에 나가기 시작한 후 출근을 안 하는 주말에도 아침 7시 30분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긴장하게 된다. 사회복지사를 꿈꾸며 500만원짜리 적금을 붓고 있는 민이도 분식집 이전과 이후 가장 달라진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기 싫으면 안 일어나곤 했던 내가 이제 일을 해야 하니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돌보게 됐다”는 것. 예전엔 몸이 아프면 병원에도 잘 안 가고 약을 과다복용하거나 거의 안 먹던 습관에서 벗어나 감기가 조금만 걸려도 병원을 찾게 되고 약을 처방받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손님을 접대하는 일자리를 얻었으니.

아이들이 “은숙쌤”이라 부르는 매니저 임은숙씨는 “이 친구들은 손님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 같다”며 “‘인공 조미료를 전혀 안 넣은 김치’ ‘조미료 대신 파인애플을 갈아 넣은 떡볶이’가 아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져 손님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밀어질 때 그것은 몇 천원 이상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임 매니저는 십대들이라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텐데도 부득이하게 몸이 아주 아플 때를 제외하곤 결근도 거의 안 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엔 특별 근무까지 하며 분식집을 성공시키려는 아이들의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석 달 남짓 되는 동안 분식집의 월 매출은 250만~300만원대를 상회하게 됐다. 그래서 임 매니저는 “아이들 안부를 묻는 단골손님도 제법 생겨 올해부터는 수지타산이 맞을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면서도 “돈이 너무 잘 벌리면 그 재미에 빠질까” 또 걱정이다.

“그동안의 관찰 결과, 분식집 일을 단순한 아르바이트로 생각하는 친구들보다 공부에 욕심이 많아 일과 검정고시 준비를 병행하는 친구들일수록 자립 의지가 높았다. 시간적으로 더 여유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일과 공부, 두 가지 욕구가 함께 있어야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자립학교와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청소녀들을 우선순위로 해서 뽑은 조잘조잘 분식집 초기 스태프는 6명. 이들 중 4명이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고 1명은 이미 고졸 합격증을 받았다.  

분식집은 이들에게 대안적 문화공간의 역할도 한다. 강의, 독서, 토론 소위 ‘인문학 3종 세트’로 불리는 프로그램도 전개되고 가벼운 몸 운동 강습도 있다. 분기마다 격월 주기로 대전, 부산 등 지역의 자활센터를 격려·방문하며 서로의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십대들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단 밝다는 것이 참 감탄스럽다. 아픈 과거 역시 얼마 안 가 잊어버린다. 이런 것이 이들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힘일 것이다. 청소녀들이 대학이나 또 다른 직업을 탐색할 수 있는 힘이 이 조잘조잘 공간을 통해 배가 되길 희망한다.”

윤혜린 소장이 분식집 운영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