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마지막 해 겨울 유난스런 폭설이 내리던 12월에 나는 계동길의 오래된 목욕탕 근처 작은 골목길 끝자락의 제일 높은 층에 방을 하나 얻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잘 몰랐던 한겨울 추위를 그제야 느끼기 시작했다. 패딩점퍼 하나 없이 왔던 터라 달달 떨며 계동길에서의 첫 아침을 맞았는데, 그날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본 창밖 풍경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작은 한옥들의 검은빛 기왓장 지붕 위에 쌓인 하얀 눈의 풍경. 고향이 남쪽지방이기에 눈에 대한 로망이 있어 춥든 말든 당시엔 별로 상관도 안 하고 좋기만 했다.
내가 기거하던 작은 방은 꼭 시골집 구들방 같았다. 방바닥은 뜨끈뜨끈한데 이불 밖으로 나온 얼굴과 코끝이 찡하도록 우풍이 들어오던 방이어서 몸을 꼭꼭 눌러주는 옛날 목화솜을 넣은 이불이 아니면 그 추위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어려서 살던 곳은 골목길이라곤 거의 없는 지역이었던 데다 컨테이너 트럭이 대로변을 쌩쌩 달리거나, 대문만 나서면 바로 버스가 다니는 큰길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낭창하게 산책할 만한 작은 골목들이 별로 없었다.
한적한 계동길에서 시작한 나의 생활은 너무나 만족스럽고 평화로웠다. 계동길 근처의 출판사 겸 일종의 문화원 같은 성격을 띤 곳에 일자리를 얻어 출퇴근길이 거의 산책길이었으니까. 오며 가며 계동길에 남아있는 옛 서울의 자취를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것도 무척 재미난 일이었다. 계동길 끝에 있던 중앙고등학교의 교정도 그때 처음 밟아보았는데, 아무도 없던 이른 아침의 그 교정은 무척 신비롭기까지 했다. 내가 무슨 ‘러브스토리’ 같은 옛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 곳이 나중에 ‘겨울연가’의 촬영지가 됐고 지금은 일본인들의 관광지가 됐다.
근처 학교의 음악시간이면 몇 번이고 반복되던 노래들, 창문을 열면 보이는 기와들, 그 기와 위에 잠자고 있던 고양이 가족들, 어릴 적 문방구가 그대로 재현된 듯한 촌스러운 문방구점,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던 묘하게 평화로웠던 일상들. 내가 나다운 게 뭔지 몰라서 힘들었던 20대를 지나 20대의 마지막 겨울에 다시 서울로 훌쩍 올라와 지친 날개를 접고 숨어들어 잠시 쉴 수 있었던 작은 골목, 계동길.
슬리퍼를 끌고 몇 번이나 오가도 싫증이 나지 않던 나의 첫 골목길인 ‘계동길’에서 살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던 것 같다. 계동길이 더욱 각별한 것은 그 시절, 그 골목길에서 갖게 된 정서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쳤던 인연들이 씨앗이 되어 자라나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계동길의 현재는 다행히 삼청동처럼 카페로 넘쳐나지 않고 그래도 조용히 손바느질하는 가게들이 제법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가게들의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있어 계동길 걷기란 손바느질을 하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재봉틀로 드르륵 후다닥 박아버리는 것이 아닌 한땀 한땀 손바느질 하는 행위와 같은. 손바느질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손바느질이란 하기에 따라서 중노동이 될 수도 있고 진지한 수행이 될 수도 있고, 노동과 헐렁한 휴식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산책이란 바로 이 헐렁한 휴식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의미의 손바느질인 것이다.
산책이라는 마음의 손바느질을 실제로는 발로, 몸 전체로 오감을 열어 해나가면서 과거에 잘못 박은 곳은 풀어가기도 하고 아니면 과감히 잘라버리기도 하고 너무 팽팽하게 바느질되었던 곳은 느슨하게 풀어주고 반대로 너무 느슨하게 된 곳은 적당히 당겨주기도 하고. 어떨 땐 실밥이 다 풀어진 곳도 발견하게 되는데 그냥 다 뜯어버려 후련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또는 다시 차분하게 담담히 꿰매어 새로 박아주기도 하고. 그런 행위와 다름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