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임신 등 왕성한 번식력 자랑…동물 중 여성 상징
도덕성 지닌 ‘꾀보’가 되라
꾀쟁이 토끼는 덩치 큰 호랑이를 이겼다. 빠른 두뇌 회전과 민첩한 행동력으로 최고 권력자 용왕 앞에 끌려갔으나 기죽지 않았다. 결국 사지에서 기사회생해 돌아왔다. 힘과 권력을 지혜로 이긴 것이다.
뉴밀레니엄 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저물어가고, 네트워크가 중시된다. 일방향성 올드 미디어보다 양방향성 소셜 미디어가 대세다. 스마트 파워 시대에는 몸보다 머리가 똑똑한 인재가 각광 받는다. 상사의 지시에 순응하면서 묵묵히 오랜 시간 일하는 하드 워킹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중시되는 스마트 워킹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민첩한 토끼형 인간이 육중한 맹수형 인간보다는 훨씬 더 스마트 워킹에 적합하다.
‘토끼가 제 방귀에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좋지 못한 일을 꾸미다가 제 풀에 겁을 낸다는 뜻도 있지만,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짓을 비아냥거릴 때 흔히 쓰인다. 토끼 이야기는 남이 구슬리는 소리에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 경망함이나 헛소문에 들뜨는 모습을 표현할 때도 곧잘 등장한다. 머리 좋은 것만 믿다 윤리의식을 잃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혜의 밑바탕에는 고도의 도덕성이 깔려야 한다는 얘기다.
토끼에게 배우는 위기관리 능력
교토삼굴(狡兎三窟)은 꾀 많은 토끼가 세 구멍의 굴을 판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은 “도주로를 여러 곳 마련해두면 추격자를 쉽게 따돌릴 수 있다”며 “몸집이 작은 초식동물로 태어난 토끼는 ‘쫓기는 자’의 상징”이라며 “토끼의 왕성한 번식력은 약자의 생존방식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설화 속 토끼는 덩치 좋고 힘은 강하나 우둔한 동물들에게 저항하는 의롭고 꾀 많은 역할을 도맡았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호랑이는 탐관오리와 양반을 빗댄 경우가 많고, 토끼는 가진 자들에게 밟히고 시달리는 민중을 상징했다”고 전했다.
토끼는 속임수의 명수다. 얼마나 꾀보였으면 토끼라는 명사에서 ‘토끼다’는 동사가 생겼을까. ‘별주부전’으로 불리는 ‘토끼전’은 조선시대의 한글소설로 그 근원 설화는 고구려 ‘귀토지설(龜兎之說)’이다. 죽을 고비에 처한 신라 김춘추도 이 설화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백제의 침략으로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정탐꾼으로 몰려 죽게 됐다. 그를 구원한 것이 바로 토끼 간 이야기라는 것.
자라(혹은 거북)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왕 앞으로 끌려갔다가 간을 내놓으라는 협박에 “내 간은 육지에 두고 왔다”는 기지로 토끼가 위기에서 벗어났듯 김춘추는 “신라가 우리에게 빼앗아간 땅을 내놓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연개소문의 협박에 “내가 신라로 돌아가 왕을 설득해 땅을 돌려주겠노라”고 하곤 풀려났다고 한다.
천진기 과장은 “‘귀토지설’에 등장하는 토끼는 힘은 약하지만 꾀가 있는 존재로 만병통치약으로 쓸 수 있는 ‘간’을 지닌 동물”이라며 “이것은 토끼가 불로장생을 상징한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토끼는 여성 원리에 속하는 동물, 즉 ‘달의 동물’로 여겨져 왔다. 달은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 정해진 주기로 모양이 바뀌며 밤과 차가움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여성의 생리현상과 ‘음’의 속성을 달과 연결시켰다. 달은 방아 찧는 토끼가 사는 곳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달-여성-토끼’는 같은 고리를 이룬다는 얘기다.
‘달-여성-토끼’는 같은 고리
창덕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에는 토끼 형상이 새겨져 있다. 또 경복궁 교태전 뒤뜰의 석련지에는 두꺼비와 함께 토끼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천진기 과장은 “대조전과 교태전은 왕비의 거처”라며 “여성성의 상징인 토끼를 통해 달, 즉 월궁(달 속의 궁궐)을 형상화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토끼가 여성을 상징하는 동물이 된 데는 왕성한 번식력도 영향을 미쳤다. 토끼는 이중 임신이 가능하다. 뱃속에 새끼를 품고 임신이 가능하다. 일정한 발정기 없이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해 새끼를 잉태할 수 있는 생물은 인간을 제외하곤 오직 토끼뿐이라고 한다.
토끼날인 ‘묘일(卯日)’에는 남의 집 남자가 집안에 들어오면 좋다고 한다. 토끼가 여성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동국세시기’에는 새해 첫 토끼날인 상묘일(上卯日)에는 “남의 식구를 집에 들이지 않고, 나무로 만든 그릇도 들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가 남의 집에 먼저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풍습 때문인지 지금도 일부 지방에선 토끼는 방정맞은 경망한 짐승이라 해서 이 날은 이른 아침은 물론 해가 뜬 뒤에도 여자는 바깥 출입을 엄금한다.
우리에게는 토종 ‘엽기 토끼’ 캐릭터 ‘마시마로’와 미국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의 나비 넥타이를 맨 토끼 로고가 친숙하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토끼 복장의 ‘바니걸’은 플레이보이의 마스코트다. 토끼가 사람과 가까운 애완동물인 점에 착안해 여성을 남성의 애완물로 상징화했다.
성장·번창·풍요 상징
토끼는 십이지 띠 동물 중 네 번째이며 방향은 정동(正東)이고, 달로는 음력 2월을 지키는 방위신이다. 2월은 농경사회에서 한 해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다. 최인학 인하대 명예교수는 공저 ‘십이지신 토끼’에서 “토끼를 뜻하는 한자어 ‘묘(卯)’에는 만물의 성장, 번창, 풍요의 의미가 있다”며 “이는 농경민족의 특성이자 토끼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토끼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오전 5∼7시에 해당된다. 아침밥, 새벽잠, 아침술을 묘반(卯飯), 묘수(卯睡), 묘음(卯飮)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토끼는 달에서 불로장생약을 찧는다고 해서 장수의 상징이자 달의 정령으로 받들어졌다. 항아가 서왕모에게서 받은 불사약을 남편인 예 몰래 혼자 먹고 달로 도망갔다는 중국 설화는 달과 동일시된 토끼의 장생불사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우리 역사 기록에 토끼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6대 대조왕 25년이다. 그해 10월 부여국에서 온 사신이 세 개의 뿔이 달린 하얀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달 속에 그려진 토끼 그림이 많이 나온다. 중국 지안시 장천 1호분 벽화에는 달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가 두꺼비와 함께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