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도 매일 엄마, 아빠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 새삼 편지를 쓰려니 조금 쑥스럽네요. 가까이 있는 사람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는 것처럼 부모님이 늘 곁에 계시기 때문에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어요.
일 욕심, 공부 욕심에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늦둥이 막내딸. 그 딸 뒷바라지 하느라 친구분들은 은퇴하고 쉬시는 연세에도 땀 흘려 일하셨죠. 두 분 모두 칠순이 넘어 편하게 쉬셔야 할 지금도 저는 계속해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두 분께 감사드리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가슴 한쪽에 늘 자리잡고 있어요.
제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도 엄마는 “막내는 결혼 안 시키고 계속 같이 살 거야”라고 하셨죠. 그런데 결혼 생각은 없는 줄 알았던 막내딸이 부모님 세대에선 상상할 수도 없었던 동성동본에 같은 항렬이라는 뜻밖의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죠. 두 분 많이 당황하시고 속상해 하시며 반대도 하셨죠. 하지만 끝내 딸의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한 가족으로 맞이해 주시고 지금은 세상 누구보다 아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결혼한 후 두 분께 생애 처음으로 두 분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찾아왔었죠. 그것도 잠시, 2년 전 규민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저희가 들어와 함께 살면서 다시 두 분의 시간은 없어졌죠. 20개월 된 개구쟁이 손자를 돌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직장 생활한다고 살림은 뒷전인 딸을 대신해서 사위 식사까지 챙겨주시는 엄마.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 사온다고 직접 시장에도 다니시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막내 사위부터 찾으시는 아빠. 인생 중 가장 편안해야 할 시기에도 자식에게 온전히 삶을 내어주시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에요. 제가 두 분처럼 자식을 위해서 내 삶을 내어줄 수 있을까 자문해 보면 자신이 없어지네요.
규민이와 장난치고 놀아주시는 아빠의 모습에서 제가 어릴 때 느꼈던 항상 일상에 쫓겨 바쁘고 엄하신 아빠의 모습이 아닌 푸근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의 행복한 표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저 또한 행복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배려’와 ‘희생’이란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평생을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오신 엄마가 칠순을 넘기시면서 “내가 이제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우울했는데, 이제 규민이를 봐주게 되어 다시 내가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기쁘다”는 말씀을 해주셨죠. 또 “왜 외손자까지 봐주느냐!”며 핀잔하는 친구 분들께 “내가 너무 잘난 딸을 낳아서, 막내딸이 성장하려면 손자를 좀 봐줘야 해. 그리고 젊은 오빠랑 놀아서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미안해하는 저를 보고 웃으셨죠.
초등학교 때부터 누군가 저에게 “가장 본받고 싶고, 제일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저는 “부모님을 제일 존경한다”고 서슴없이 말했답니다. 그 이유는 두 분께서 항상 성실하고 거짓 없이,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내는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종교는 없지만 늘 베푸는 삶을 실천하시며 사셨죠. 그런 부모님을 닮아서 저희 4남매 모두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삶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꿈을 꾸는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한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희생을 다 보답할 수는 없겠지만 두 분께서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는 딸이 되도록 더 힘껏 노력할게요. 또 저희 규민이를 정의롭고 현명한 세상에 보탬이 되는 훌륭한 아이로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저희가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 또 손자들이 성장하는 모습 지켜봐 주세요. 엄마! 아빠! 말로는 부족하지만 항상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