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스를 걷기 위해 아침 일찍 동회선 일주 시외버스를 타고 시흥초등학교 앞에서 내려 올레길 사무소를 찾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올레길에서도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올레 패스포드를 살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았는데 값이 무려 1만5000원이나 했다. 산티아고의 순례자 여권이 1~3유로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게다가 올레 패스포드는 실제적으로 할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흥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패스포드를 살 때 함께 받은 안내책자 가격이라면 두 개의 가격을 따로 책정해 개인의 의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올레 패스포드 때문에 구입하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찜찜했다.
일정상 올레길 전 코스를 다 걸을 수 없으니 몇 코스만 걷자고 마음먹었는데 1, 1-1, 2, 5, 6코스를 걷고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원없이 걸었으니 이제는 좀 쉬엄쉬엄 걷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한번 걷기 시작하면 무념무상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걷지 않는 날은 좀처럼 좀이 쑤셔 결국 다음날 다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7코스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함께 걷고 있던 파올로가 묻는다.
“한국 여자들은 걷는 것을 좋아하니?”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걸으면서 만난 한국인은 대부분 여자였던 것 같다. 한국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걷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한국 여자들 용감한 것 같아. 너도 그렇고. 서양 사람들이라고 해도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 근데 우리가 만난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였잖아.”
정말 그랬다. 한라산에서 만난 직장을 그만두고 왔다는 그도, 미처 챙기지 못했던 여름휴가를 뒤늦게 받아 올레길을 걷는다던 그도, 모두 여자였다. 용감하고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한국 여성들!
제주의 돌담길을 지나 오름을 오르내리며 바닷바람이 멈추지 않는 해안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걸으며 제주에는 감귤 이외에도 당근과 야자수를 심고, 우도에는 속껍질째 먹는 땅콩을 많이 심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광지에서 돈을 주고 탔던 불쌍한 말이 아니라 짜리몽땅하고 볼품없지만 단단하고 건강해 보이는 제주 조랑말이 자유로이 풀을 뜯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길을 걷는 올레꾼을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제주의 많은 사람들이 올레길이 생기고 뭍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제주가 더 좋아질 거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올레길 정보를 듣고 일부러 제주를 찾는 일도 기대할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올레길 곳곳에서 농약병과 함께 뒹구는 물병과 음료수병, 과자봉지 같은 쓰레기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바닷길을 걸을 때는 바다에서 밀려온 쓰레기까지 뒤엉켜 악취까지 더해지니 더 심했다. 올레꾼이 직접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을 갖추고 있는 숙소도 찾기 힘들었다. 제주도의 물가가 비싼 것을 감안할 때 매 끼니를 식당에서 해결해야 한다면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랬던 것처럼, 올레길 때문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매일 새로 도착하는 여행객들로 마을이 활기를 띠고, 그들로 인해 지역 경제가 살아나고,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때 우후죽순 지어져 노후해진 모텔들은 과감히 리모델링에 투자해 제주다운 숙소로 환경을 재정비해야 할 것이며,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해안을 도는 버스와 지선버스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노선도 실용적으로 바뀌어야 할 듯 싶다. 더 이상 걷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모순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제주를 찾는 올레꾼들이 공중도덕과 질서를 지켜줘야 할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세상 속을 걷는 용감한 한국 여성들을 위해 올레길이 그 시작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