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물’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한국 정치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내용들로 이뤄졌다 해서 방영 전부터 관심이 높았던 작품이다. 아울러 탄핵, 자국민 피랍사건, 비자금 수사 등 현실 정치를 오버랩 시키는 요소들을 적극 활용, 초반부터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 와중에 평범한 직장인 여성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고현정, 차인표, 권상우 등 배우들의 호연으로 뒷받침하면서 화제성을 더했다.

그런데 회가 거듭할수록 여성 대통령 서혜림(고현정)에 대한 나의 실망은 커져가는 중이다. 남편이 아프간에서 피랍·살해되어 겪게 된 절절한 아픔으로 정치에 눈을 뜨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이가 없게 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는 서혜림의 존재감을 단연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의 정당한 분노와 순수한 열정은 서혜림을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주었다. 특히 우리 드라마에서 늘 가족에 파묻혀 충동적이고 부정적 감정에 얽매여 자신을 소모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편재된 상황에서 사회와 정치와 국가로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여성 캐릭터를 지켜보는 즐거움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혜림 캐릭터가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가 자꾸 눈에 들어와 그를 보는 즐거움이 예전만 못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캐릭터에 대한 전략이 부재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정치인으로서의 캐릭터는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이어서 현실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 캐릭터에 눈물, 포용, 따뜻함 등 감성만을 입히려 드는 것은 한두 번은 통할지라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정이다(혹 그것이 여성에게 적합한 미덕이라 생각하는 걸까?). 치밀함과 단호함, 통찰력 그리고 분명한 정치관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정치인 캐릭터로서 매력적이다. 그래서 과하다 싶은 강태산(차인표) 캐릭터가 오히려 서혜림보다 존재감이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혜림 캐릭터의 퇴행을 보면서 자연스레 연상된 것은 바로 ‘선덕여왕’의 ‘미친 존재감’ 미실이다. 교활할 정도로 치밀한 책략가이자 철권을 휘두르던 통치자이고 철저하게 현실적인 정치가 미실을 경이롭게 형상화했던 연기자가 바로 고현정 아니던가. 미실은 선악의 경계를 넘어 정치가와 정치에 대한 매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미실의 죽음과 함께 선덕여왕의 명장면으로 꼽는 이른바 ‘미실과 덕만의 6분 토론’은 정치의 현실과 이상을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고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른바 ‘환상’을 통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미실과 ‘희망’을 역설하는 덕만의 통치인식이 불꽃 튀듯 접전을 펼치는 장면은 그 어떤 토론 프로그램보다 흥미진진했다. 이 두 여성 정치가의 카리스마와 진정성은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고, 현실정치가 주지 못하는 판타지를 배가시켰으며, 여성 정치인 캐릭터의 모범 사례가 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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