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령이와 함께 산책을 가려고 경비실 옆을 지날 때였다. 평소에 인사를 주고받던 경비 아저씨가 씩 웃으시며 “전업주부 되셨나 봐요?”라며 인사를 건네셨다. 그 순간 “예”라며 어정쩡하게 대답하고는 쑥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얼마 전부터 아저씨가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터였다. 공원을 걸으면서도 전업주부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내가 전업주부라고’ 전업주부라는 말은 특별한 직업을 갖지 않고 육아는 물론 모든 집안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것을 뜻한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나는 그렇지는 않다. 육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만 살림살이는 아내와 나누어 하고 있다. 그런데 단지 이러한 차이 때문에 이 말이 귀에 거슬렸을까.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 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남자와 전업주부라는 말이 연결될 때 상식처럼 떠오르는 부정적인 인식이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자가 능력이 없어서 집에서 아이나 키운다는, 이런 마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적으로 나의 의지에 따라 육아를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은 육아는 여자가 하고 바깥일은 남자가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이것은 상식이 된다. 상식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상한 일로, 혹은 개인의 잘못이나 무능함으로 넘겨버린다. 그 사람이 어떠한 가치를 선택했는가는 애써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남자가 할 일이 없어서라는 말로 쉽게 결론내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자신에게 던지는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아이를 돌보기 전에 나는 아이를 돌보려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하고 특히 세 살 이전은 더욱 그렇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며 이 시간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답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이 과정은 남자의 육아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설득하는 작업이었다. 육아는 여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오래된 상식을 당연하다고 믿었던 내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은연중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저씨의 말 한마디를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잡아두었던 셈이다. 논리로 당위성을 부여하여 설득하는 것과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있었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눈앞에 드러났다. 공원을 산책할 때면 느꼈던 아주머니들의 불편한 시선은 사실은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낸 시선이었다. ‘남자가 어째서’ ‘남자가 능력이 없어서’라는 질기고 오래된 상식에 마음이 붙들렸던 것이다. 혹은 예전에 아이를 안고 바삐 가던, 안쓰럽게 보였던 어느 아빠와 지금의 나를 동일시해서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냥 인정하고 흘려보내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이날 이후 내 마음에 있었던 부정적인 인식을 인정하고 흘려보냈다. 그러고 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생각해도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를 돌보면서 순간순간 아이가 변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변해가는 나 자신을 알아채는 이 모든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이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아이에게 창밖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로는 나지막하게 노래도 불러주곤 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