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내게 ‘유혹’이었다. 아끈다랑쉬오름의 능선에서 만난 은빛 억새들의 춤사위에 탄성을 터뜨리며 황홀했고 키를 넘는 억새밭 한가운데서 누워버린 억새 줄기를 밟았을 때 들었던 소곤거림 ‘뽀각 뽀각’은 마치 원시림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10월 말 해거름에 만난 억새들의 출렁거림은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잠시만 한눈을 팔면 앞서가던 동행을 놓칠 만큼 훌쩍 큰 억새들이 부딪치는 바람소리는 제주가 아니면, 아끈다랑쉬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장관이다. 게다가 이름은 또한 얼마나 예쁜가. ‘아끈’은 둘째 또는 버금가는 뜻을 지녔고 다랑쉬 역시 제주 말이다. 분화구의 모양이 달처럼 생겼다 하여 월랑봉(月朗峰)으로 표기한단다.
저만치 멀리서 볼 때 그저 그런 동산이려니 생각했던 언덕이 가까이 다가가자 부드러운 곡선으로 능선을 그리고 있다. 아끈다랑쉬오름이 그랬다.
비고(산의 뿌리부터 정상까지 순수 산 높이) 58m이니 13층 건물이 채 안 된다.
오름은 작은 산봉우리를 표현하는 제주 방언으로 하나하나가 분화구를 갖고 있는 기생화산(寄生火山)이다. 정상에는 화산이 분출되면서 생긴 큰 웅덩이인 굼부리가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 전체에 흩어져 있는 기생화산구인 오름은 368개나 된다.
제주 설화에 따르면 키가 큰 설문대할망이 삽으로 흙을 떠 일곱 번 던졌더니 한라산이 됐고 이 할머니가 신고 다니던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덩이들이 오름이 됐다고 한다.
제주의 전설은 대부분 오름과 연관이 있을 만큼 오름은 제주 사람들의 정신과 생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단다. 오름 주변에 마을을 세우고 밭을 갈고, 말과 소를 오름의 초지에 풀어 먹이고 그렇게 오름과 가까이 살다가 죽으면 오름 능선 가까이에 묻어 마을을 굽어보게 했다. 오름 주위에 묘지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2593-1. 큰길가 주차장에서 농지 2개를 건너니 바로 오름 입구다. 아끈다랑쉬 오름을 추천, 안내한 제주인 고병희(53) 사장님 부부는 오름수칙 하나를 일러준다. “가로질러 가고 싶더라도 절대로 밭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서 간다”고. 그건 오름의 미학이 유유자적, 여유로움과 느림이어서다. ‘천천히’ 돌아서 가는 것을 즐기란다. 능선도 돌아서 가고 굼부리도 돌아서 가고.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억새들의 물결치는 반짝임도 변화무쌍하다. 억새 숲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그 물결이 바람과 하모니를 이룬 합창을 들었다.
능선을 따라 올라왔던 서쪽을 뒤돌아보니 다랑쉬오름의 제법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지그재그 탐방로가 아득해 보인다. 앞쪽으로는 탁 트인 시야다. 멀리 일출봉과 바다까지.
10여 분 올라 이렇게 제주를 굽어볼 수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맑은 날엔 우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단다. 작은 오름의 정상, 이곳서 ‘하늘 가까이 왔다’는 높이를 충분히 만끽했다.
깊이 약 10m, 둘레 약 600m의 원추형 분화구는 아담한 경기장을 연상케 하는데, 그 분화구가 온통 억새 군락이다. 정상 자락에 묘지 하나가 보인다. 고씨할망의 묘란다.
내려오는 등산로가 미끄러워 손수건을 꺼내 바람에 누운 억새 줄기를 붙잡고 한 걸음씩 내디뎌야 했다. 비닐포대 흙길은 물기를 머금어 사정없이 미끄러웠다.
제주를 여러 차례 갔지만 오름 탐방은 처음이었다. 1976년 한림과 협재의 에메랄드 빛 바다에 탄복했고 80년대엔 돌담 안에 빼곡히 핀 메밀꽃에 황홀했다. 그 다음엔 눈부신 유채꽃의 아름다움이 눈길을 끌었다. 올레 걷기에선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귓가에 담을 수 있어 좋았다. 오름은 진정 제주를 느낄 수 있는 트레킹이었다.
다음엔 꼭 맞은편 다랑쉬 오름 정상에서 아끈다랑쉬 오름의 비행접시가 사뿐히 내려앉은 자태라는 분화구 전경을 내려다봐야지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