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로 준비할 것은 별로 없었다. 두 해 전 가을, 지리산 둘레길을 처음 걷고 나서 몇 번 걷다 보니 뜻이 통하는 지역 친구와 내 집 같은 시골집이 여럿 생겼다. 평소보다 조금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고 음식 솜씨 좋은 주인이 하는 민박집을 알고 있으니 그 집의 최대 잠자리에 맞춰 참가자를 모았다. 각자 물병을 지참하고 가볍게 짐을 꾸리고 바닥이 미끄럽지 않고 길이 든 운동화나 트레킹화를 신고 오기를 당부했다. 초보 도보 여행자들이 많으니 출발 전 약국에 들러 물집 방지에 좋은 바셀린도 챙겼다.
인월에 도착하니 일기예보대로 가랑비가 우리를 맞는다. 예보가 틀리기를 바랐지만 그게 욕심이란 걸 안다. 가뭄이 심할 때는 날이 아무리 좋더라도 길을 걷는 것을 자제하는 게 길 여행자가 가져야 할 예의이자 상식. 지리산길안내센터를 들러 지도를 챙기고 부근 식당에서 인심 넘치는 돌솥밥을 먹고 터미널 2층에 자리한 ‘어슬렁’에 들렀다. 지리산이 좋아 친구가 된 사람들, ‘지리산생명연대’의 복합문화공간이다. 박혜란 동인은 티셔츠를 두 장 고르더니 환갑 선물 커플티라며 조옥라 동인에게 안긴다. 언제부터 또문에서 커플 챙겼지 하며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평소 신체 건강한 여행자라면 걷기 여행에서만은 자기가 감당할 만큼 짐을 가볍게 싸서 갖고 가면 좋겠다. 걷다 보면 배낭이 내 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고, 배낭을 뒤적이며 쓸데없는 짐을 덜며 괜한 욕심을 부린 것을 알게도 되고 꼭 필요한 것은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가방을 꾸리는 일이나 삶을 꾸리는 일이나 비슷한 데가 있으니.
걷기와 별로 친하지 않은 절반 넘는 일행이 중황마을에서 실상사로 내려갔고 이번 여행의 주인공을 포함해 남은 인원은 여섯. 평소 대중교통을 즐겨 이용하는 이들. 걷기에 좋은 인원이다. 길거리 쉼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감칠맛 나는 구절초 식혜로 갈증을 달래고, 전을 시킨다. 접시 한가득 푸짐한 감자전과 곰삭은 묵은지 맛에 반해 배가 부르다고 하면서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의 걷기를 마친 일행 여섯과 도중 하산해 실상사에서 차담을 나누다 온 사람들은 창원마을 민박집에서 다시 합류해 같이하지 못한 몇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맑은 공기 가득한 시골집에서 싱싱한 생명으로 정성껏 차린 밥상과 편히 쉬어 갈 소박한 잠자리는 오성급 호텔 부럽지 않았다.
이튿날 들른 금계 쉼터에서는 이 지역에서 구한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고, ‘지리산NO댐주민모임’ 주최 댐 건설 예정지 걷기 행사 참가자들과 이야기마당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 순천, 남원에서 여성·생태·교육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길이 이어준 예기치 않은, 아니 예정된 만남으로 생일잔치는 더 풍성해졌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의례가 품을 나누고 정을 나누기보다 금전을 주고받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지 오래된 요즈음,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을 함께하는 일. 길을 걸으며 밥을 나누며 그동안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고 함께할 나날을 그려본 1박 2일은 참가자 모두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