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 고등부 최우수상|최선(연변한국국제고 1)

‘아버지’란 말보다는 ‘아빠’란 말이 더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분, 그분은 바로 내 아버지다.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엄격하고 거리가 있고 어려운 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늘 나에게 장난을 거는 오빠와 같이, 때로는 작은 것을 갖고 티격태격 싸우는 친구같이 늘 가까운 존재였다. 어머니가 오죽하면 남매를 키우는 것 같다고 하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밖에서 아무리 힘들고 피곤한 일이 있어도 집에 올 때 기쁘다고 하신다. 나를 만날 생각을 하면 설레고 기뻐 발걸음이 가볍다고 하신다. 그래서 집안에 있어도 계단을 걸어오는 아버지의 발소리를 금세 눈치 챌 수 있다. 집이 가까워지면 막 뛰어오시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면 바로 내 방부터 들어와 나부터 챙기신다. 귀찮아서 퉁명하게 대하는 나를 오히려 더 귀엽다는 듯이 안아주고 볼을 비벼댄다. 이젠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그만하라고 타박을 해도 아버지의 눈에는 여전히 나는 아기인 것 같다.

내가 무례하게 대해도 나에겐 항상 관대하고 친구처럼 장난만 치는 아버지는 내 눈에는 존경할 만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나의 아버지는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대학교에 봉사하러 우리 가족을 이끌고 6년 전에 중국으로 오셨다.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중국 조선족 학생들을 가르치며 봉사하고 계신다. 늘 학교와 학생들의 문제로 가슴이 꽉 차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싫거나 피곤한 내색이 없으시다. 좋은 옷이 있으면 가난한 학생들에게 가져다주고, 시시때때로 학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이신다. 부모님이 멀리 외국에 돈 벌러 가서 외로운 학생들에겐 아버지의 역할을 하시느라 나는 외동딸이면서도 마치 많은 형제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버지는 가정에서는 늘 웃으며 화를 낸 적이 없다.

아버지가 딱 한 번 화를 무섭게 낸 것을 봤는데, 나는 그것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일본에 연수를 다녀왔다. 공항에 부모님이 나를 마중 나오셨다. 그런데 나를 맞이해야 할 아버지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공항 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그 사람 주위에 몰려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난 너무 창피해서 아버지를 부르지도 못하고 구석에 숨어버렸다. 평소에도 어린아이처럼 굴던 아버지여서 늘 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항에서 큰소리를 내며 싸우는 아버지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소리까지 치면서 싸우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아버지를 피해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들어보니,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근로자로 입국을 했는데, 그들을 인솔하던 사람이 줄을 세워놓고 소리치며 기를 죽였다고 한다. 한국에 미리 와있던 친구가 그 근로자 중 한 사람을 마중 나와서 반가워서 인사했는데, 그 인솔자가 그 자리에서 소리를 치고 머리를 때리고 욕을 했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일하러 온 사람에게 왜 욕을 함부로 하냐고 인솔자에게 처음엔 정중하게 말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뭔데 참견을 하냐면서 서로 시비가 붙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외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온 불쌍한 사람들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그 인솔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런 약자들을 많이 봐왔고, 당신의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한국에 돈 벌러 와서 고생하고 당한 이야기들을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참지 못했던 것이다. 불같이 화를 내며 항의하는 아버지께 결국 그 인솔자의 상급자가 달려와서 정중하게 몇 번이나 사과하고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끄러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국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나를 달랬지만, 나는 그 사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느라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 정의로운 아버지를 이해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었다.

아버지가 하얼빈을 거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하얼빈의 겨울은 무척 춥다.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여서 어머니가 특별히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챙겨 주었다. 그런데 돌아온 아버지의 몸에 오리털 파카가 없었다. 파카가 어디 갔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그냥 누구에게 주었다고만 했다.

하얼빈에서 아버지가 아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에게 옷을 주었느냐고 어머니가 계속 물었다. 게다가 그 오리털 파카는 특별히 비싼 가격을 주고 산 옷인데, 아무에게나 줄 옷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속이 상해 있었다.

어머니와 나의 질문 공세에 아버지가 결국 실토를 했는데, 하얼빈에서 만난 거지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 본 중국 거지에게 그 비싼 파카를 주었다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머쓱하게 웃으며 “나는 곧 따뜻한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그 걸인 할아버지는 그 추운 하얼빈에서 계속 지내야 하는데, 입은 옷이 너무 얇아 보여서 얼른 벗어서 주었어요”라고 남의 말 하듯 말했다.

그 일로 어머니가 며칠 동안 그럴 줄 알았으면 헌 파카를 입혀 보낼 걸 하며 아까워 하셨다. 그래도 부창부수라고 어머니는 나중에는 잘했다고 아버지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더 이상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후에 더 이상 오리털 파카를 얻어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의 못 말리는 일은 비단 이런 일뿐만 아니다. 내가 사는 지역엔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역이어서 북한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한국인이 중국 내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공식적으로 불법이다. 서로 같은 민족이면서도 타국에서 만나는 해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비극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 탈북하여 중국 땅을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탈북자들이 있는데, 동족의 사랑으로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어 간간이 도와주곤 한다.

교회에 가는 길목에 늘 나와 있는 탈북자 걸인에게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노동을 하며 돈을 벌라고 훈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이 노려보기도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늘 그렇게 도와주는 일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구걸하는 사람이 미안하게 여기지 않도록 성경책 갈피에 그 사람에게 줄 돈을 끼워놓았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면 얼른 그 돈을 주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돈을 주는 것이야 말릴 일이 아니지만, 어떤 때는 끼고 있던 장갑도 벗어주어 한겨울에도 아버지는 장갑 없이 지내야만 했다. 내가 사는 곳의 겨울은 한국과 달리 추워서 보통 영하 20~30도의 매서운 추위인데, 아버지는 그 추위 속에서 장갑 없이 지냈다. 나는 아버지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없으면서 남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아버지가 어린 나보다 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이젠 어머니도 나도 다 포기하고 말았다.

내 아버지는 약한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 편에 서있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늘 안타깝다. 아버지는 나를 보호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아버지를 보호하고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분이다.

어젯밤에 아버지가 흰머리를 뽑아주면 용돈을 주겠다고 해서 보니, 아버지의 머리에 이제 하얗게 안개꽃이 가득 피어나서 뽑기도 어려웠다. 보기 싫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는 늙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평생 내 곁에서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 친구처럼 계셨으면 좋겠다.

아빠, 나도 이제 고등학생이에요. 그런 유치한 장난은 그만하세요.

나를 안고 장난치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소리친다. 평생 그렇게 아버지께 소리치며 화를 내고 싶다. 그래도 아버지는 껄껄 웃고 다시 나에게 장난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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