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여성단체가 살렸다
검찰·여성단체가 살렸다
  •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10.11.12 11:38
  • 수정 2010-11-12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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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 매맞고 산 정황 인정돼

“폭력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에게 희망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남편을 살해해 구속됐던 한 할머니의 사건은 검찰·여성단체·지역사회가 긴밀히 연대하면 값진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향후 유사 사건의 수사·재판 과정에도 주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57년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해오다 76세의 나이에 83세의 남편을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지난달 21일 구속됐던 유모 할머니. 그가 11월 5일 광주지검 순천지청으로부터 구속취소 결정을 받고 풀려나기까지는 그의 사건을 담당했던 순천지청 김욱 검사가 검찰시민위원회에 사건을 안건으로 올렸고, 그 결과 20여 명 위원 전원이 석방 결정 권고를 내린 것이 주효했다.

김욱 검사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검찰시민위원회는 ‘이번 사건은 할머니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책임질 문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가정폭력·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은 반드시 있지만 검찰이 이 부분에 완전한 전문가는 아니기에 관련 전문기관에 자문을 구하고 연계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검사는 구속된 할머니와 첫 대면하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는 것. 이후 지역 여성단체에 도움을 구하면서 진정서 제출 등이 효과 있을 것이란 요령도 알려주었다.

김 검사와의 연계 속에 사건 발생 지역인 고흥에서 활동하는 유숙영 전국가정폭력상담소협의회 전남권역 대표(한국가정법률상담소 순천지부 부설 순천여성상담센터장)를 중심으로 8개 여성단체가 연대해 11월 2일 진정서를 제출했다.

검찰시민위 “할머니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책임”

유숙영 대표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스무 살에 결혼해 딸 7명과 아들 1명을 낳고 57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했던 할머니는 ‘아들’을 못 낳는다는 것이 꼬투리가 돼 ‘낫으로 배아지를 긁어버린다’ 등의 폭언을 들으며 일생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분”이라며 “진정서에 자신도 모르게 평생 남편에게 매질을 당해왔던 공포와 분노가 일순간 폭발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그는 검찰의 주선으로 구속 열흘 만에 할머니를 1시간 동안 면담한 경험을 들려주며 “당시 할머니가 가장 뼈아프게 되뇐 말은 ‘참을 걸, 참을 걸…’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할머니는 그 때까지도 오랜 가정폭력의 후유증으로 지속적으로 배, 옆구리, 다리 등에 통증이 심해 약과 주사에 의존해 겨우 지탱하고 있는 상태였다.

유 대표는 “담당 검사가 가정폭력 피해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할머니가 석방되면 편히 쉴 만한 거처까지 수소문하는 정성을 보여주었다”며 “할머니는 구속된 상황이었으면서도 ‘이곳에 오니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편하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고 전했다.

사건을 곁에서 지켜본 광주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차경희 소장은 “검찰이 여성 인권에 대한 고민과 이해를 이번 사건에서처럼 깊이 한다면 우리가 운동하는 10년, 20년 못지않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이명숙 변호사는 “검찰이 오랜만에 좋은 결정을 내렸지만 이에 감동하기보다는 당연히 이뤄져야 할 정의가 이뤄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할머니가 오랜 가정폭력으로 외상후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려왔기에 정당방위 이론을 적용해 무혐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가정폭력 피해자의 사건에서도 아동·노인·장애인 등에 적용하는 감형 요소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여성단체가 얼마나 열심히 심신미약과 정당방위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연대하느냐의 문제다. 우발적인 가정폭력 살해사건의 경우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아내의 형량이 이번 경우처럼 석방이나 1년 미만에서 10년 가까이로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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