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린 우리 목소리를 담을 우리만의 그릇이 절실히 필요했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우격다짐으로 누르고 밀쳐냈던 민중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러나 민중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민주화라는 거대 담론에 가려져 좀체 세상 밖으로 울려 퍼지지 못했다. 세상이 좋아지면 여성도 저절로 살기 좋아질 테니 공연히 힘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주문도 있었다.

우리는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이 좋아지면 여성도 저절로 살기 좋아지는 게 아니라 여성이 살기 좋아져야 좋은 세상이 된다고 믿었으므로. 나아가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선 더 이상 ‘객관적이고 중립적인’(이라고 쓰고 ‘남성의’라고 읽는다) 눈에 기대지 말고 우리 자신의 눈,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로 결정했다.

22년 전, 주주가 되기를 자청한 수많은 여성의 열정으로 여성신문은 세상에 나왔다. 이후 22년 동안 단 한 차례의 결호도 없이 발행된 여성신문은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을 말하고, 여성의 손으로 세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 한국 여성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여성과 연대하는 여성 정론지로 자리매김했다.

여성신문은 지난 22년 동안 한결같은 목소리로 여성을 대변해 왔다. 가족과 성 그리고 일터라는, 여성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서 여성을 괴롭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샅샅이 파헤치고 엄중히 고발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 왔다.

22년은 과연 어떤 시간이었던가. 창간이래 오늘까지 지독하리만큼 끈질기게 여성신문을 사랑해 온 한 여성으로서 나는 여성신문이 헤쳐 온 22년의 의미가 새삼 무겁게 다가옴을 느끼고 있다. 한마디로 22년은 참으로 짧고도 참으로 길었던 시간이었다.

사회면 1단 기사로 족했던 성폭력 문제가 이젠 온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를 만큼, 요지부동일 것 같던 호주제가 완전히 폐기처분될 만큼, 아들만 둔 부모가 동경의 대상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변할 만큼 22년은 여성들과 여성신문에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한국 여성은 적어도 법과 제도라는 측면에서 그들에게 들씌워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성신문은 믿음직한 동반자로 신뢰를 굳힐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22년은 우리 여성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감지하기엔 아직도 짧은 시간인 것 같다. 무엇보다 가정과 일을 조화롭게 누리고 싶은 수많은 여성에게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2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팍팍하기만 하다. 일 갖기도 힘들고 아이 키우기도 힘든 상황은 과거와 현재를 거쳐 미래에까지도 유효할지 모른다는 비관적 전망에 여성들은 많이 우울하다. 아울러 여성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남성 위주의 성문화, 여성의 일상을 구속하는 폭력문화, 여성의 본성을 위축시키는 경쟁문화는 오히려 22년 전보다 더욱 극성스러워져 진정으로 공존과 상생의 문화를 원하는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여성신문의 목표는 언제나 여성의 고통지수를 최소화하고 행복지수를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수많은 여성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현실은 여성신문에 섣부른 자만과 안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여성신문은 단 한순간도 창간 정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여성신문을 각별히 사랑하는 독자들은 말한다. 여성신문의 역사 22년 자체가 기적이라고. 맞다. 그렇지만 어디 여성신문만이 기적이랴. 한국 여성들, 원래부터 기적을 잘 만드는 여자들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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