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에 백수가 태반인 세상 … “5천원 밥 한 끼에 붉은 띠 매는 시대?”

남자들이 때 아닌 인권을 외치기 시작했다. 바로 ‘남보원’(KBS 2TV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등장이 그 신호탄인데, 그 인권의 골자란 “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 날까지”다. 이들은 어쩌다 밥 한 끼에 혁명을 외치는 ‘찌질한’ 존재들이 된 것일까. 한 시사 주간지는 ‘남보원’의 탄생 배경에 대해 비정규직 아니면 백수가 된 남성들이 5000원 때문에 붉은 띠를 맨 상황이 찾아왔다면서 “경제적 기반은 사라졌는데 남자 역할은 계속 요구받으니 스트레스가 쌓였나요?”라고 속내를 들춰낸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 경제위기 속에 비정규직과 백수가 속출하는 한편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기존 책임과 역할을 강요받는 남성들의 뒤틀린 심사를 희화화했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 경제위기 속에 비정규직과 백수가 속출하는 한편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기존 책임과 역할을 강요받는 남성들의 뒤틀린 심사를 희화화했다.

“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 날까지”‘찌질이’의 출현

 

신자유주의 시대,  과학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면서 실은 더욱 시장이 질주하는 토건국가화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양극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정규직 남성들은 다시 가정을 돌볼 시간 없이 일터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한편 대다수 남성들은 비정규직과 실업자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맹렬한 정보사회의 산업역군’이 되기를 강요당하는 ‘성공적 사냥꾼’들은 ‘시간의 궁핍함’ 속에서 불행해하면서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다.

반면 후자는 돈의 궁핍함 속에서 미래에 불안과 주변의 따가운 시선으로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좀 다른 남자들이 생겨나야 하지 않는가?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남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승자독식 사회의 승자가 되고 싶지도 않은,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이들의 반란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작은 보고서다.

스스로를 일컬어 ‘주변화된 남성’(주류 남성 사회에서 주변화됐다고 생각하는 남자)이라고 주장하는 30대 남성 6명을 심층 인터뷰한 보고서를 싣는다. 모두 이성애자로 미혼 2명, 기혼 4명으로 구성됐으며 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나온 ‘30대 대졸 직장인’들이다. 여섯 명 중 다섯 명은 비정규직이다. 취재원들의 요구에 따라 이름을 모두 가명 처리했다.

‘오빠주의’는 질색…“주체성·독립성 갖춘 여성 원해”

피에르 부르디외는 “남자를 칭찬하기 위해서는 ‘그는 남자야’라고 말하면 충분한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 명제와 충돌한다. 이들은 남보원의 구호에는 동의하지만 “코바늘로 십자수를 뜨는” 여성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여성에게 강요된 여성성과 남성에게 강요된 남성성 모두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낸다.

출판사를 다니는 정민호(33·기혼)씨의 이성관은 명확하다. “주로 중성적이고, 주체적인 여성과 만났다. 밥값 똑같이 내고, 얻어먹기도 하고, 돈 있으면 내고…애교 떨고, 예쁜 척하는 여자는 정말 밥맛이었다.”

회사원인 김철민(35·기혼)씨는 “현모양처는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논쟁하고, 대화하고, 자기 일을 가지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피력하고, 공연 기획 일을 하는 강진한(35·기혼)씨는 “여성스럽고, 화장을 즐겨하는 그런 여자는 딱 싫다”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이들에게 여성스러움이란 가부장제의 메타포이자 포비아로 작용하는 듯하다.

반대로 자기 주장이 강하고, 개성 넘치는 여자들은 동등한 관계가 가능할 뿐더러, 김철민씨의 말처럼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든든한 여자인 것이다. 오빠주의에 대한 경계도 거기서 연유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이한경(35·기혼)씨는 오빠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오빠와 동생이라는 호칭에서부터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연하는 내게 ‘어떤 권위’를 부여했고, 알아서 이끌어주고, 오빠로서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다. 남자는 ‘~를 해야 해’라는 부담을 나는 싫어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강진한씨는 아내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가부장적이고, 돈 잘 벌고, 마초 같은 남자들이 주지 못하는 걸 내가 주고 있기 때문이죠. 나와 헤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마초 남자들을 많이 겪은 모양이에요. 그런 남자들이 명품 백은 사줄지언정 ‘돌봄’ 같은 가치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지배문화, 남성문화’(또 하나의 문화)에서는 고정관념적인 남성다움을 내면화하고 있는 남자들 가운데 삽입 중심의 성관계를 남자로서의 핵심적 능력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면서, 이러한 고정 관념은 또 다른 심각한 증세를 야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터뷰한 남성들은 남성의 ‘성 본능화’ 이데올로기가 일정 부분 강요된 ‘허구’임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섹스라면 환장”은 강요된 편견과 허구일 뿐

남자들 모두를 ‘발정난 개’로 보는 편견에 거부감을 표현하는 박윤수(32·미혼)씨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말이 가장 싫다고 토로한다. 마케팅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남자는 섹스라면 환장을 한다’는 생각은 남자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이라고 일갈한다.

이러한 성 본능화 이데올로기는 남성 중심 조직사회의 밤 문화와 짝패를 이룬다. 특히 은밀한 행위를 통해 남성 연대의 도구로서 활용되는 접대문화 앞에서 이들은 갈등을 일으킨다. 회사원인 차영우(37·미혼)씨는 대기업을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문화에 저항했다가 심한 욕설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한번은 룸살롱을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상사가 내게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너 얼마나 잘났느냐”고 말했다. 김철민씨 역시 직장 내 권위적인 밤 문화와 마찰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룸살롱을 가자는 그들과 선을 그었는데, 그때마다 “남자가 왜 이래?”라는 식의 말을 자주 던졌고, 소외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룸살롱에 가는 것을 모든 남자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룸살롱이 왜 싫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꾸로 ‘왜 좋죠?’라고 묻고 싶다. 나는 왜 좋은지 이해 못 하겠다.”

박노자씨는 ‘씩씩한 남자 만들기’라는 책에서 남성다움이란 수많은 모순과 갈등을 내포한, 단선적이지도 단일하지도 않은 담론이었음을 밝혀낸다. 그는 한국 사회의 남성 만들기 과정에서 “경제능력이 없는 남성들은 철저하게 소외 당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분석하고 있다. 인터뷰한 대다수의 취재원들이 이 같은 ‘남성다움’과 충돌하고 있었다.

가사일 하는 남성들 “사회적 시선 때문에 죄 짓는 느낌”

이한경씨는 “남자가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집에서만 일을 하면 가부장적 역할에 시달리는 남자들은 ‘특이한 사람이네’라고 폄하한다. 그러한 시선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죄를 짓는 느낌을 받는다”고 진술한다.

정민호씨는 남성을 일터의 재생산의 주체로만 보는 조직과 충돌한다고 말한다. “애가 아픈데 남자인 네가 왜 집에 가느냐라는 말을 들었는데, 난 단지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이가 아파도 집에 갈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여직원들이 자신을 얕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여자가 다니기엔 적당하지만 남자 직장으론 좀 그렇지”라고 말한다면서 “남자가 출판사 다니면 대부분 영업이나 인쇄 쪽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혼남은 사적 노동과 관련해 남성으로서의 가치를 적나라하게 마주한다고 한다.

이한경씨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 타인으로부터 남자로서 변변치 않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말은 남자를 자본주의 경제 주체로서만 판단하는 오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육아, 집안일 등 사적 영역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여태껏 사적 노동에 대해 의미 부여를 안 해온 것이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그 일을 전담하고 있다면, 사회적으로도 거기에 대한 가치가 부여돼야 할 것”(김철민)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적 계층 분화를 더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남성성의 위기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하는 수 없이’ 그 기득권을 내려놓고 있는 중이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 그간 유리하다고 여겨지기만 했던 남성성이 도리어 무거운 십자가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한 ‘주변화된’ 남성들과 남보원의 ‘찌질이’들의 출현은 이러한 과도기를 반영하는 일종의 증후일 것이다. 또한 이들의 양성평등주의나 성규범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은 한편으론 강한 여성의 능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기득권을 재생산하려는 전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부장제에선 유리했던 남성성, ‘십자가’의 억압으로

하지만 이 시점에서 유의미하게 바라봐야 할 점은 어차피 한통속인 가부장제의 노예들이 아니라 균열을 보이고 있는 남성들 간의 차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남성들이 자신들의 남성성을 억압으로 느끼는 순간, 젠더는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주변화된 남성들의 ‘애로사항’에도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 아닐까. 취재원들은 한국 사회에서 “야망이 없는 비리비리한 놈”이거나 “여자에게 휘둘리는 병신” 혹은 “집에서 아이나 돌보는 한심한 남자”라는 수식어를 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성규범적인 편견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사적 영역에 대한 가치 평가는 돌봄에 소질이 있다고 말하는 남성들과 함께 바꿔나가야 할 여성주의의 가장 큰 사안 중 하나가 아닌가. 또한 ‘어미의 태(모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모자 간 도착적인 관계에서 짐작하건대, 이러한 남자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그들의 ‘엄마’가 떠맡게 될 것이다.

하성란씨는 최근 여성 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소설 ‘A’를 펴내면서 이렇게 인터뷰했다.

“이 소설은 힘없는 남성들에 대해 쓴 소설이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는 너무 과도하고 과중한 책임을 남성에게 지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A’에서 남성의 역할은 여성과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것과 같이 낙태를 한 아내를 고발하는 남편이 존재하는 절망적인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기표를 남성이 대체할 수는 없다. 성 평등한 사회는 아직, 너무도 아득한 미래다. 그러나 ‘여성주의는 남성에게 유익한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답할 때가 온 것 같다. 엘리자베스 바텡테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심층 인터뷰에 응한 30대 남성 6인

박윤수(32·대졸·미혼)

일반 기업 마케팅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사회생활을 통해 “현재의 가부장제는 남성을 돈을 버는 행위로만 평가한다”고 신랄히 꼬집는다.

정민호(33·대졸·기혼)

출판사 기획자로 “가정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남성에게 일터의 재생산 기능만을 원하는 조직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다.

강진한(35·대학원 졸·기혼)

공연기획자. “여성과 남성의 삶의 농도를 맞춰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철민(35·대졸·기혼)

회사원으로 “남성에게도 ‘돌봄’을 할 수 있는 권리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한경(35·대졸·기혼)

소프트웨어 개발자.

조직생활을 거부하고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택한 이유로 “접대와 권위적인 문화, 그런 것들이 싫다”를 꼽는다.

차영우(37·대졸·미혼)

회사원으로 “여자와 남자가 왜 서로 다른 화장실을 써야 하는가”란 단순하고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남녀 성차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성별을 나누는 것, 그것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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