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길은 사람이 많음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나도 그 길을 따라오다 보니 한국이란 이 낯선 땅에서 정착한 지 어느덧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2001년 한국 땅을 밟았을 당시,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상상하며 설렘이 가득했다. 인천공항으로 마중나온 남편의 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하면서 아쉬움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전주에 도착하니 내 앞에는 내려오며 보았던 고층 빌딩과 현대식 건물대신 옛날에 지어진 한옥 건물이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2층으로 된 열린주택에서 살았는데… 마음속에 말 못할 그 무엇이 솟구쳤다.

집 마당 한편에 위치한 재래식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찌나 눈가에 눈물이 핑 돌던지 ‘능력이 없으면 장가도 가지 말지, 왜 나를 데려왔어’ 하며 남편을 원망하곤 했다.

1년이 지났을까 남편 친척의 도움으로 중국어 학원에 취직하면서 삶에 활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항상 향수에 젖어있던 나였지만 어떻게든 중국어를 잘 해보고자 까만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향 생각이 점점 잊혀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결혼이주 여성에게 한국어를 수업하는 한국어 교육지도사를 하게 되었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오면서 언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에게 한국어를 교육해주는 일이었다.

학습자가 같이 사는 시부모의 한국어만 듣다보니 내가 발음하는 한글의 연음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의심을 받은 일부터 전년도에 같이 수업을 한 중국한족인 주량씨와 ‘전북 음식 맛 축제’에 참가해 홍쏘우 풍천 장어를 만들어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은 일까지.

처음에는 실망 가득한 한국생활이었지만 그 속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어느새 한국살이 10년차를 맞고 있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생활, 혹자는 나더러 한국에서 성공한 이주 여성이라 말하지만 글쎄… 아직 성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중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이 아닌 한국인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한국에서 많은 경험을 하며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한국인 박신홍’으로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언젠가 스스로 나 자신을 인정할 그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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