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찰’은 ‘쓸데없는 다른 짓을 하다’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인데, 나는 이 말을 강진에서 알게 됐다. 예를 들면, 전라도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심부름 보낼 때 ‘해찰부리지 말고 바로 와야 한다 잉∼’과 같은 말을 여전히 종종 쓰는 편이다.

근데 해찰이 말 그대로 ‘쓸데없는 짓’일까? 심부름 다녀오는 아이가 해찰부리는 건, 십중팔구 자신이 심부름 중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재미난 다른 일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해찰부리지 않으려면 재미난 일을 재미난 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집을 향해 걷기만 해야 한다. 좌우 둘러보며 막 만들어진 두더지집이나 두더지길, 기하학적인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거미집, 어디선가 나타나 보기 드문 색깔과 무늬를 뽐내는 나비에도 정신 팔리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호기심과 관찰력을 다 죽여야 한다.

그네를 밀어주던 아빠를 붙들고 “아빠, 가지 마, 엉엉엉” 울며 아빠의 출근을 막았던 딸과 출근까지 포기하며 어린 막내딸의 불안을 다독여주던 우리 아빠. 나이 들면서 대화도 줄어들고, 결혼과 함께 집을 떠난 뒤에는 지극히 형식적인 안부만 묻던 아빠였다. 하지만 언제나 아빠는 일곱 살 그때의 나를 지켜주던 유일하고도 든든한 ‘백’이었다.(김은형의 ‘바통 터치’ <좋은 생각> 2010년 9월호)

아빠의 ‘해찰 부림’이 딸에게는 평생 ‘사랑의 빵’이 되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글을 쓰는 게 삶의 일부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새벽 공부하려고 일어나 공부 좀 할라치면 졸음이 쏟아지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으면 ‘세상에 이렇게 말을 시처럼 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고 이렇게 해서 나는 새벽 공부 시간에 셰익스피어 전집을 다 읽었다.

어느 정도 글을 쓰면서 살게 된 소양이 이때의 해찰 부림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해찰이 실은 삶의 근원적 가치를 이해하고 성찰하고자 하는 ‘해찰’(解察)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제주 올레를 필두로, 도처에 걷는 길이 생기고 걸으면서 우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도시인의 ‘끝없는 앞으로의 행진’이 이제 올 데까지 왔구나, 이제 해찰이 시작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동료들이 몸담고 있는 가배울은 우리의 남도길 만들기 프로젝트를 ‘해찰(解察)길’로 부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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