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서툰 서연이는 ‘엄마’ ‘아빠’만 제대로 말한다. ‘응가’인지 ‘엉아’인지 그 비슷한 말과 ‘마마’인지 ‘맘마’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발음, ‘앙돼’(‘아야’ ‘안돼’는 아닌 것 같고) 등 도통 이해가 어려운 말을 한다. 다른 말은 “어~ 어~”로 통한다. 안아달라고 조를 땐 두 팔을 높이 들고 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어~ 어~” 하고, 배가 고플 땐 엄마 찌찌를 만지며 “어~어~” 칭얼댄다. 말을 배운 딸은 이런 단어를 하루 종일 연습한다. 언어학자들이 언어를 배우려면 수천 번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신기한 건 엄마가 “어~” 한마디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배고픈 건지, 목말라 물을 찾는 건지, 바람을 쐬러 나가자는 건지, 어디가 아프다는 건지 안다. 가끔은 심리 상태까지 파악해 “응~ 서연이가 이것이 갖고 싶구나, 서연이가 마음이 상했구나, 서연이가 짜증이 났구나” 같은 대화를 한다. 그러면 짧게 대답하듯 “응” 또는 “어~”로 화답한다.

때때로 “서연아, 목욕할까?” 하면 옷을 벗겨달라며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만세를 하고 기저귀를 손으로 벗는 시늉을 한다.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어~어~” 한다. 또 “네 물컵 가져와” “아기 곰인형 가져와” 등 심부름을 시키면 용케 알아듣고 “어~” 하는 대답과 함께 눈치껏 시키는 것을 한다(드디어 우리 집에 심부름 잘하는 콩쥐가 생겼다).

아기와 엄마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한다. 온전하진 않지만 대화가 가능하다. 물론 단순하고 간단한 내용이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집중하고 신뢰한다는 것일 게다. 어린 딸이 말하기 위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건 눈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눈치가 생긴다는 건 순수하고 깨끗한 딸의 마음과 생각이 변해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들처럼 눈치만 빨라지고-순수함이 없어지고- 말귀를 못 알아듣고 자기 말만 늘어놓진 않는다.

어른이 되면 상대방의 말귀를 알아듣기 위해 귀 기울이고 집중하고 마음 쓰는 것을 점점 더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소통의 부재 시대에 살고 있다. 소통을 하기 위해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귀 기울임이 필요하다. 우린 점점 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서연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세상에 살더라도 가슴으로 진솔한 대화가 통하는 여성이 되면 좋겠구나. 세상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위해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 되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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