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여인 칼리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독일에서다. 그때 칼리는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어를 거의 못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미소로만 인사하고 헤어졌었다. 그런데 지난해 칼리가 남편과 함께 베를린 교외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고 해서 그곳을 방문했는데, 그 사이 칼리는 독일어가 아주 능숙하게 됐으므로 우리는 그녀의 집 정원에 있는 멋진 오픈 발코니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아기를 안고 마중 나온 칼리를 보고 나는 처음에 좀 충격을 받았는데, 그녀의 티셔츠에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이 지나자 자연스러운 의문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왜 나는 충격을 받았을까? 티셔츠에 난 구멍 자체가 끔찍하게 모양이 흉측한 것도 아니고 구멍을 통해서 속살이 보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손님을 맞을 때 옷차림이 단정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믿음, 구멍이 난 옷은 단정치 못하므로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회적인 관습에 뿌리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혼란스러웠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단정한 옷차림과 예의범절은 자연에 기초한 진리처럼 인간의 마음을 직접 건드리는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지 악수를 오른손으로 해야 하며 군인은 손을 머리에 대고 경례를 한다는 식의,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서로의 편의를 위한 피상적인 행동양식일 뿐인가.

그리고 나는 이후에 몽골 서북부 알타이를 여행하게 됐다. 알타이에서 유목민의 아이들이 구멍이 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처음에 나는 그 아이들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매우 가슴 아팠지만 알타이에서 한 달 남짓 유목민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런 생각이 차츰 바뀌었다. 유목민들이 부자가 아닌 것은 사실이고 새 옷을 사기 위해 돈을 쓸 여유가 많지 않겠지만, 그런 경제적인 측면을 떠나서 그들의 오랜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자연환경이 그들의 행동양식에 더 큰 작용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삶이 곧 자연이고 자연은 곧 노동이며 놀이이다. 그리고 세탁을 자주 하지 못하는 유목민들에게 깨끗하고 화려한 새 옷은 일상에서 큰 의미가 없을 터였다. 그들은 손님을 매우 반기고 손님에게는 아낌없이 가진 것을 대접하지만, 그럴 때의 의복이나 겉차림을 손님상에 내놓는 밀크차의 맛처럼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유목민 아이들의 구멍 난 옷이 빈곤이나 혹은 부모의 무신경을 곧바로 상징한다는 도시적인 편견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칼리의 티셔츠에 난 구멍을 크게 의식했던 나 자신이 참으로 작은 인간임을, 만들어진 개념에 사로잡혀 살아온 인간임을 되새길 때가 많다. 나는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항상 부끄러우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칼리의 티셔츠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 부끄러움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어쩌면 영영 모르고 말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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