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을 바라보는 엄마가 늙은(?) 딸의 산후조리를 해야 하는 게 걱정스러웠다.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을 털어놓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뭐가 어렵냐…. 넌 니 딸 먹이고 난 내 딸 먹이고 그렇게 하면 되지.”

쿨하게 말씀하시곤 쇠고기 미역국, 전복 미역국, 멸치 미역국 등을 하루 세끼 해다 바쳤다. 우유, 떡, 과일 등 간식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힘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그렇게 각자의 딸을 충분히 챙기자던 엄마는 결국 손녀딸까지 챙겨야 했다. 모유수유 하느라 잠이 모자란 나를 위해 낮엔 아기를 돌봤다. 내리사랑이라던 옛말이 틀리지 않는가 보다.

생후 한 달 동안 아기는 수시로 젖을 물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를 안고, 바닥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 보니 오른쪽 손목과 허리가 삐걱거렸다. 워낙 늦은 나이에 아기를 낳은 터라 한 번 늘어난 뼈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았다. 나를 안쓰러워하던 엄마는 하루 종일 젖을 물고 있는 아가에게 “엄마 좀 그만 파먹어라” 하셨다. 사실 엄마를 파먹는 건 이 늙은 딸인데 말이다. 결혼해서 애까지 낳고도 여전히 엄마를 파먹으니 자식은 평생 부모를 파먹고 사는 존재인가 보다.

엄마는 내 산후조리를 하면서 3kg쯤 살이 빠졌다. 그렇게 다이어트를 해도 안 빠지던 살이었는데…. 엄마는 입맛 없으면 밥맛으로 먹고밥맛 없으면 입맛으로 먹으면 되지, 왜 입맛·밥맛이 없느냐며 이해가 안 간다고 하시던 분이다.

서연이 아빠가 외국에 있다 보니 거의 24시간을 나 홀로 육아를 감당했다. 산후조리가 끝난 후에도 반은 부모님 댁에, 반은 우리 집을 왔다갔다 하며 지냈다. 아기를 데리고 외출 한 번 하려고 해도 챙겨야 할 짐이 많은데 하물며 한 달 중 반을 친정에 왔다갔다 하니 짐이 장난이 아니었다. 늘 이사를 다니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서연이가 어려서 혼자 운전하기 힘들어 아버지가 그야말로 모시러 오고 모셔다 주고 하셨다. 무슨 상전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받기만 했다. 뒷좌석에서 운전하는 아버지의 늙은 뒷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참뜻을 몰랐었다. 입으로만 “고맙고 사랑합니다”였다. 언제나 나 잘난 맛에 살았다. 말로만 겸손한 체 했었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서 이렇게 사랑스런 생명이, 존재가 나에게 왔음이 고마웠다. 파먹을 부모가 있는 게 고맙고, 그런 부모님의 사랑이 또 한없이 고맙다.

*필자 조혜영씨는 대학졸업 후 학부모 단체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교육·대안학교·청소년·여성·환경 분야에서 일했다. 여행 좋아하고 수다를 사랑하는 자유로운 몸과 영혼으로 바람처럼 노니며 살았다. 마흔셋에 결혼, 지금은 좌충우돌 아이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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