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 연주나 미술, 바느질이나 요리, 심지어는 운동화 끈 매기까지 손으로 하는 일은 분야를 막론하고 뭐든지 최악인 내가 과감하게도 커피 생두를 사다 집에서 로스팅을 해보기로 한 것은 순전히 타고난 못말리는 호기심+커피에 대한 지극한 애정 때문이다.

고가의 로스팅기 따위는 물론 없다. 커피 한 잔을 좀 신선하게 마셔보자고 이 더운 날씨에 한 시간 가까이 불 앞에 서서 팔을 휘젓고 있어야 하다니. 커피를 저어주는 틈틈이 나는 얼마 전에 산 책을 한 손에 들고 읽는다. 제목은 ‘전쟁미망인, 한국 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면서 한국전쟁을 좀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쓴 자료를 찾던 내 눈에 그 책이 들어왔다. 나는 그것이 내가 모르는 시대의 ‘여성’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그 책이 그 점을 기획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성 화자들의 목소리는 내가 짐작하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의 미칠 듯한 통한과 슬픔의 직접적인 오열이 들려올 것이라고 기대를 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나는 대학 졸업반 즈음 학교 앞에 생긴 웬디스란 미국계 패스트푸드점을 통해 처음 커피의 맛을 배웠던 것 같다. 그 전에는 특정한 커피 전문점을 제외하고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웬디스에서는 진한 원두 추출액에 물을 타 희석시킨 아메리카노를 팔았다. 지금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다. 에스프레소에 요란한 첨가물을 잔뜩 얹은 테이크아웃 커피의 팬도 아니다. 대신 독일식으로 진하게 우려내 우유를 살짝 탄, 아주 커다란 잔에 든 장식 없는 하우스 커피를 좋아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하고 자랐다. 아마도 친척들 중에 특별히 비극이라고 할 만한 경우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거의 일생 동안 내게는 한국전쟁이 오직 흘러간 역사로만 생각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혹은 좀 많이 과장을 하자면 임진왜란처럼.

최근 몇 년 동안 독일문학을 집중해서 읽고 또 번역작업을 하면서 나는 독일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결코, 조금도 끝나지 않은 문학적 테마인 것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것이었던, 그리고 지금도 아마도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속해 있을 것이 분명한-나는 그렇게 믿는다-그러나 나는 결코 알지 못하는 그 한국전쟁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남편들은 총알받이로 나가 죽고, 어이없이 끌려가 죽고, 비참하게 학살을 당했다. 그들은 남편과 작별의 절차조차 거치지 못했다. 전쟁미망인들의 육성을 읽는 내내, 나는 왜 이들이 남편의 죽음에 미친 듯이 반응하지 않는지, 혹은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지 의아했다.

물론 이 책은 일종의 사회학 논문으로, 개인의 감정이나 여성적인 정서보다는 전쟁 당시의 전 국가적 차원의 폭력에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들은 마치 남편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진술하고 있는 것일까란 의아심이 드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어쩌면, 전후에 그들을 건실한 일꾼으로만 살아가게 만든 유·무형의 폭력과 유사한 어떤 강제가 그들을 극도로 수줍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설사 이 질문이 너무나 철없는 전후 커피세대의 것처럼 들릴지라도, 독자여 용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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