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은 지난 15년간의 여성 삶의 변화와 의미를 생각해보고 향후 비전을 모색해보는 전문가 좌담회를 열었다. 정영애 서울사이버대 교수(노인복지학과, 차기 한국여성학회장),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 유성희 한국YWCA연합회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새 판을 짠다”는 대전제 아래 호주제 폐지 이후 연대와 협력이 미흡했던 여성계가 이제는 각 단체의 성향과 무관하게 “한 판에서 한 마음으로 만나야 할 때”라며 다양성을 아우르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여성단체에 2030 젊은 세대가 진입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공감을 표했다.
정영애 교수는 주거 교육 폭력 등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회현상 중심에 ‘여성’이 있어 ‘여성’ 하나만을 놓고 여성문제를 볼 수 없는 복합성을, 차인순 심의관은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뀐 듯 보이는 착시 현상을 지적하면서 “성평등 의식이 미약해 결과적으로 성차별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그는 1999년 대통령직속 여성특위가 주축이 돼 공적 영역에서의 성차별을 규제하는 남녀차별금지법을 어렵사리 만들어냈으나 결국 폐기된 아쉬움을 토로했다. 현재는 신낙균 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평등기본법안에서 남녀차별금지법의 정신을 되살려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성희 사무총장은 여성단체들이 각각의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서로 만나 소통하고 연대해야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현장과 이론이 함께 만나고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여성운동의 비전이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은 좌담회 주요 내용.
성폭력 성매매 가사노동 등 새로운 개념 만들어지고 인식 변화해
여성신문: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된 지 15년이다. 15년간 우리 여성들의 삶에 대해 각각 평가를 한다면.
정영애 서울사이버대 교수(이하 정 교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많이 변했다. 사람들이 여성차별에 대해 인식하게 됐다. 하지만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성별분리가 더 정교해져 오히려 ‘백래시’(반발)를 당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더 어려워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예전에는 ‘남자는 일, 여자는 가정’이라고 했다면, 이젠 ‘남자는 일, 여자는 일과 가정’이 돼버려 슈퍼우먼 강박증이 만만치 않다. 여기에 성매매나 아동성폭력, 가정폭력 등 사건들이 빈번히 발생하는 걸 보면 법과 제도는 정비됐지만 과연 내용상으로도 그러한가 하는 의심이 든다.
차인순 국회 입법심의관(이하 차 심의관): 15년간의 의미 있는 성과는 ‘성차별, 가정폭력, 성폭력이 나쁜 것이구나’ 하는 인식의 변화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법과 현실이 괴리됐다는 것이 가장 큰 지적이다.
사람들의 인식은 변하는 것 같은데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변화된 인식을 사회 현실에서 구체화시켜 성차별을 줄여나가는 것은 사실 이제부터다.
정 교수: 1990년대 말 기자들이 ‘성희롱이 뭐냐’고 많이 물어왔었다. 성폭력, 성매매 등의 개념이나 가사노동이라는 용어도 90년대 이전에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15년간 굉장히 많은 개념들이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됐다.
유성희 한국YWCA연합회 사무총장(이하 유 사무총장): 여성학의 등장으로 여성운동 진영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 같다. 진보적인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많은 단체의 지원과 협력 하에 범여성계가 법과 제도를 개선한 것이 큰 성과였다고 본다.
하지만 소외되고 열악한 피해자 중심의 여성운동은 다수의 여성들이 동참하기 어렵고, 생활체감도가 높지 않은 운동이었다. 또 소위 중산층이라고 하는 교육 받은 여성들이 여성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음에도 운동방식의 차이로 함께하지 못했었다.
이제까지의 여성운동은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 나머지 여성들은 오히려 구경꾼이 됐었다. 여성운동이 지난 15년 동안 이룬 것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는 그 내용을 어떻게 두텁게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여성신문: 법과 제도의 개선만으로 마치 여성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도 문제다.
여성운동, 현실문제 해결 넘어 새판 짜고 비전 제시해야
정 교수: 지금까지의 여성운동이 현실의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새 판을 짜고 주도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할당제 등의 제도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틀에 여성을 삽입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처음부터 여성과 남성이 함께 참여하는 판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성주류화보다도 큰 의미다.
요즘 빈번히 일어나는 아동성폭력 문제가 계급, 주거공간, 맞벌이, 다국적 이주 노동자 등 많은 문제가 중첩돼 나타나는 현상인 것처럼 여성문제 또한 독자적인 원인과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체적으로 함께 변해야 한다. ‘차별금지’ ‘호주제 폐지’ 등 과거처럼 한 가지 문제만 다룰 수 없다.
여성신문: 사회문제가 복합적인 요인들이 쌓여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여성문제인가 고민하게 된다. 특정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오히려 여성문제를 게토화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다.
정 교수: 주거나 교육 문제가 겉으로 보면 여성문제가 아닌 듯하지만 그 안에는 여성 빈곤과 모성, 보육 등 여성 이슈들이 포함돼 있다.
어디까지를 여성문제라고 선을 긋는 게 어렵다.
여성신문: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이 삶을 주도하는 영역이 크다. 정책 쪽에서 성별영향평가 같은 것이 복합적인 여성문제를 다루는 정책적 발전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차 심의관: 방법론적으로는 아직 취약하지만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성별영향평가를 통해 하나처럼 보이는 문제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두 개로 분리해서 보면 그 속에서 차별을 볼 수 있다. 일자리나 도시 만들기, 길 닦기 같은 사업을 할 때도 성별영향평가를 통한 여성차별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양성평등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소수의 사례지만 정책 영역 안에서 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로써 사고의 변화가 작지만 있었다. 비록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후에 종합해서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온다.
특히 15년 동안 인식의 변화라는 성과에서 긍정적인 두 가지를 짚고 싶다. 하나는 여학생들이 굉장히 씩씩해졌다는 것이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평등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성과는 국가 재정으로 젠더나 여성 관련 분야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 통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전에는 불평등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떤 정보도 국가로부터 제공받을 수 없어서 답답했었다. 법과 제도의 정비로 실태 파악이 이루어지면서 불평등 통계를 볼 수 있게 되고 원인을 진단해 정책을 만들게 된다.
여성신문: 초기에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수혜를 주는 입장이 아니었나.
차 심의관: 초기 과정은 여성단체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 공유한 내용을 국회의원에게 전달해 법과 제도 개선을 진행했다. 때문에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에서 나온 성과는 아니었다.
정 교수: 근본적으로 그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는 힘이 없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가 지속되기 힘들다. 사회 전반에 여성 참여율이 높아지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거나 들쭉날쭉하게 나타나는 현상의 원인이다. 여성 스스로가 제도를 만들어내고 발전시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유 사무총장: 그래서 여성운동의 기반을 대중과 공유해야 한다. 문제를 빨리 풀기 위한 절박함 속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학계나 진보적·선도적 여성 그룹과 일반 대중 지향 운동 그룹과의 갭이 존재했다. 생활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지역 여성 활동가들과 학문적인 이론은 간극이 있었다.
앞으로 여성운동의 비전은 여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대안적인 패러다임 추구라고 생각한다. 여성운동 단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푯대를 세워야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전진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
여성신문: 여성단체들이 실무자나 간사를 구하기도 너무 어렵다. 여성운동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 않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유 사무총장: 지난 시기에는 여성단체들이 대학생을 비롯한 여학생들에게 참여 기회를 많이 줬었다. 단체를 통한 청년들의 활동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단체들의 리더십을 수혈하는 통로가 됐었다.
지금은 대학생들이 무한경쟁에 내몰려 개별화되고 있어서 단체를 통한 운동이 젊은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