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미술평론서 ‘나는 치명적이다’
“아틀리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성 미술가들의 그림에 흠뻑 빠졌고 그들을 사랑하게 됐어요. 책은 그림과 작가에 대한 연서(戀書)이자 팬레터입니다.”
미술평론가 제미란(47·사진)씨가 한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14인의 여성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나는 치명적이다’(아트북스)를 펴냈다. 책은 지난 2년 6개월 동안 작가가 여성 화가들의 작업실과 전시장을 찾아 작업현장에서 직접 작품을 감상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공감의 기록’이다.
제미란씨는 ‘여성미술계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씨부터 사랑과 결혼생활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표현해 ‘이야기 하는 붓’이라는 별칭을 가진 김원숙씨를 비롯해 김은주, 김주연, 류준화, 양주혜, 한애규 등의 걸출한 여성 미술가들을 이 책을 통해 한자리에 모았다.
작가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여성 미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섬세한 감수성과 치명적인 욕망’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들은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욕망을 타고났다. 그 열망이 좌절될 때 느끼는 불안감과 상실감, 즉 ‘작가로서의 감수성’이 곧 창작성으로 발현된다”고 말했다.
특히 여성 미술가들의 삶은 누구의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의 충돌까지 더해져, 남성 작가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여성적인 삶의 이면과 ‘여자살이’의 심상을 더욱 치열하게 담아낸다.
제미란씨는 이러한 현상을 “균형적인 남성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흔히 여성성 하면 ‘모성’이니 ‘대지’니 하는 것만 떠올리지만, 굉장히 지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우리 안에 있는 여성성의 또 하나의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지적이면서도 기발한 새로운 감성을 지닌 신예 화가들을 만나면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낄 만큼 기쁘다”고 말한다.
성경과 진화론, 인간과 생태계, 신화와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섬세하고 비판적 시각으로 작품화한 화가 송상희도 그런 경우다. 제미란씨는 송상희의 총명한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으로 공룡과 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석유 전쟁과 생태계 파괴를 비유한 애니메이션(Metamorphoses16)을 꼽는다.
그는 “시나리오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자라 직접 내레이션까지 하는 모습이 능청맞고 천연덕스럽게 느껴졌다. 무거운 주제에 대해 인문학자와 같은 태도로 접근하면서도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상상력으로 풀어놓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전했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그림 감상은 작가가 무엇을 표현했느냐가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그림과 통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거나 지적 교양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그림을 보고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 안의 슬픔이나 상처와 만나고 자기치유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