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황상
정약용과 황상
  • 문용린 / 서울대 교수(교육학), 전 교육부 장관
  • 승인 2010.05.07 10:39
  • 수정 2010-05-0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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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맞는 5월은 참 좋은 달이다. 어린이, 어머니, 어버이, 스승 등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말들이 풍성한 달이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스승의 날을 또 맞는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엔 밝은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는데, 유독 스승의 날만은 씁쓰레한 소문과 함께 시작되곤 했었다. 스승의 날엔 아예 휴교를 한다는 둥… 올해엔 그런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데, 전교조 가입 교사의 명단 공개를 놓고 물밑에서 큰 고래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서, 선생님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게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명단의 공개 여부가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이겠는가? 전교조나 교총의 가입 여부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고, 알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명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호 간의 적대적 불신이 일을 크게 만들어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방의 기세를 꺾어야 하겠다는 욕심으로 대립하고 있어서, 스승의날에 볼썽사나운 대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스승의 날엔 잠시나마 그런 대립을 잊고  스승과 제자의 아름답고 진정한 관계를 음미하고 다짐하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스승은 제자와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다. 스승의 날은 제자들이 스승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스승이 자신의 스승 됨을 자문하고 자성하는 자기성찰의 날이기도 해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의 스승으로 고능선 선생을 꼽는다. 자신의 일생에 큰 전기를 이루게 해준 스승으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1년도 못 미치는 만남이었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진정한 스승-제자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윤봉길 의사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고향의 서당 선생이었던 성주록을 그는 스승으로 모신다. 새파랗게 젊은 목숨을 영웅적으로 희생한 그의 사생결단은 이런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성숙된 것이다.

이렇게 의미 깊은 스승과 제자 사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와 같은 스승-제자 사이도 아름다워 눈물이 돌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스승과 제자가 의기 투합하여 혼연일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학생은 자살해서 죽고, 교사는 해직당하여 학교로부터 추방되는 비극이 그 결말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일화는 바람직한 스승-제자 사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7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3년간의 파란만장한 공적(公的) 삶을 산다. 53년 중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20년간을 유배생활로 보내는데, 그 20년 중에서도 18년간을 전남 강진 한 곳에서 계속 지내게 된다. 이 유배생활 중에 그는 많은 젊은이와 스승-제자의 인연을 맺게 되는데 황상(黃裳)이라는 제자와의 관계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이른바 ‘정황계안’(丁黃契案)으로 알려지고 있는 에피소드다.

강진 유배생활을 시작할 때 정약용의 나이는 38세였다. 12세 황상이 정약용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한다. 이렇게 맺어진 스승-제자의 인연이 정약용이 75세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황상 그 자신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그리고 양가의 후손들에게까지 계속된다.

강진 유배생활 내내 황상은 그를 스승으로 극진히 모신다. 매사에 자신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황상을 정약용은 달래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면서 잘 보살펴준다. 황상도 시골에서 보기 드문 다산의 진면목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나간다. 이렇게 하여 18년의 세월이 흐른다. 12세였던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정약용은 56세의 노인이 된다.

이렇게 환갑을 불과 몇 년 앞두고 유배에서 풀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을 떠나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돌아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쉰다. 황상을 위시한 강진의 제자들은 다산이 그토록 좋아하는 차를 매년 힘을 합쳐 모아 준비하여 마재로 부쳐 보내곤 했다. 그렇게 하면서 다시 18년의 세월이 흐른다. 이미 황상의 나이도 48세에 이르고, 정약용은 74세의 노인이 된다. 강진의 황상은 떠나간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의 회혼례 축하와 죽기 전에 꼭 한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 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귀향 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길을 되돌려 마재로 돌아오고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0년 후 58세의 황상은 돌아간 스승이 그리워 열흘길을 걸어 정약용의 생가를 다시 찾는다. 세상을 떠난 10년 뒤에 스승이 그리워 다시 찾아온 것이다.

정약용의 아들들은 이런 황상의 정성을 다하는 제자 모습에 감격한다. 그래서 정씨(丁氏)와 황씨(黃氏) 두 가문은 계약을 맺는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져갈진저, 계를 맺은 문서를 제군들에게 돌리노니 삼가 잃어버리지 말라.”

이 계약을 후세 사람들이 정황계안(丁黃契案)이라 부른다. 스승의 날에 정황계안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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