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람이 흥분해서 소릴 지르고 있다.

“니가 그럴 줄 몰랐어.”

“내가 정말 눈이 삐었었나봐.”

“내가 착각해도 유분수지.”

“너 같은 애를 믿고 일을 맡기다니!”

말하자면 그 사람은 누군가를 향해 실망의 말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산뜻했을 관계.

그 관계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구겨지기 시작한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만큼 지독히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새 적으로 변해 버린 슬픈 이야기. 우리 주위에도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아휴, 저 웬수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내 인생이 막가는건 오직 너 때문이야”

“맙소사, 알고 봤더니 순 깡통.”

“그 사람 믿지 마, 숨쉬는 것 빼고 다 사기야.”

현실이 그들을 변하게 한 것일까?

아니면 본래의 모습을 속인채 만났기 때문일까?

그러나 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돈독해지고 각별해지는 관계가 있다.

처음엔 보통으로 생각했던 사람.

시간이 흐르고 만나는 횟수가 점점 잦아질수록 별 다섯개쯤 그려서 붙여주고 싶은 사람.

보통의 ‘보’자가 아니라 특별 하다는 ‘특’자를 써서 따로 관리하고 싶은 사람.

말하자면 다리미가 필요없는 관계라고나 할까?

그를 만난 후 내 마음을 상하거나 서로의 관계가 구겨진 적도 없어서 다릴 필요가 없다는 뜻.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내가 현실의 재산은 많지 않아도 늘 부자라고 생각하며 기쁘게 사는 까닭은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재작년에 만나게 된 신경란씨도 그런 경우다.

그녀와 나를 만나게 해준 곳은 수원에 있는 공무원연수원. 그곳에서 강의요청이 왔을 때 나는 일단 거절을 했다.

“내 말이 어디로 튈지 나도 모른다. 공무원들은 정장 차림의 강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담당교관(이것 좀 봐. 이름부터 얼마나 엄격한가?)의 말이 의외였다.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 바로 그런 강사가 필요하다. ”

그렇게 해서 나는 6,7급 여자공무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꺼번에 1백20명 정도를 대량으로 알게 된 것. 신경란 씨는 그중의 한 명, S시청 공무원이다.

그녀는 7년 전만 해도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아이들과 살면서 아파트 입구에서 베이비 숍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가 34세.

그녀의 운명을 바꾼 것은 작은 쪽지 한 장. 반상회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쪽지엔 공무원모집 요강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잡힌 활자는 ‘35세까지 자격있음’.

그녀는 머리에 굵은 띠를 질끈 동여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 이듬해 응시한 그녀는 노력의 결실을 맺게 되어 ‘합격’이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아, 그때의 기쁨이란!

그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평범한 주부에서 자기 미래는 자기가 책임질 줄 아는 열성직업인이 된 것.

아이들은 일하는 엄마에게서 자극을 받아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엄마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더욱 열심히 일한다.

욕을 먹는 공무원들도 많지만 신경란 씨처럼 여자공무원들은 대개 일밖에 모른다.

청렴도에서, 업무 면에서, 대인관계라는 측면에서도, 여성들은 단연 직장의 활력소.

나는 신경란 씨를 만난 지 3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녀를 알면 알수록 실망은커녕 놀랍고, 대단한 면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한다.

“한번도 구겨진 적이 없는 이런 관계는 정말 행복해. 다리미가 필요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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