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10.11 12:01
  • 수정 2017-10-11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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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두 개 만들어 입던‘대전여고 최고 멋쟁이’
중고교 시절 클럽 만들어 학창시절 즐겨. 고교입시 위한 자취시절 남편 첫 대면

 

사간동에 위치한 이리자 한복 연구실에서 작업하고 있는 모습.
사간동에 위치한 이리자 한복 연구실에서 작업하고 있는 모습.
중학교 시절에 나는 클럽에 들었는데, 나까지 모두 일곱명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키가 껑충하니 큰 데다 ‘튀는’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노래도 아주 잘 불렀고, 친구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니 튈 수밖에. 어렵게 살지를 않았으니까 몰려다니면서 친구들 사먹이기도 잘했고, 아버지 약국에서 계피며 감초, 용안용이라는 맛있는 건포도 같은 약재, 봉숭아 물들이는 백반 같은 것들을 막 갖다 줬다. 어릴 때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그러니 남들이 볼 때는 여학생답게 차분하지 못하고 방방 튀는 사람이었다.

클럽 친구 일곱 명 중에 나하고 이근본, 김종옥 셋이 바느질을 잘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우리 셋이 따로 곧잘 모였다. 공부는 내가 제일 못했고 두 친구는 진짜 우등생들이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1,2등과 반장을 도맡아 해오던 애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때는 그 친구들이 바느질하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나는 꺼들꺼들하니 영 바느질과는 인연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도 그때 바느질을 내가 제일 잘했다. 친구들 솜씨를 지도하기도 하고 그 부모님들 한복을 짓기도 했다.



클럽 친구 부모님 한복 짓기도

목 뒤 큰 흉터는 영광의 상처




그런데 그때는 바느질하는 것이 부끄러운 시절이었나 보다. 항상 한 친구네 골방에 숨듯이 모여 바느질을 했다. 그 친구네도 상당히 잘사는 집이었고 그 어머님은 살림만 하시는 분이었는데 별로 말리지는 않으셨다. 아마 그때만 하더라도 집에서 한복을 많이 입으셨던지라 ‘신부 수업’쯤으로 여기고 오히려 기특하게 보셨을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고등학교 시험 때문에 나는 공부에 몰두해야 했다. 그런데 학교는 멀고 공부는 해야겠고, 그래서 내 평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 자취란 것을 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친구 집이었는데, 개중에는 유성이니 신탄진 같은 데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 부모님으로서는 한 번도 집 밖으로 내돌리지 않던 딸을 오로지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육개월씩이나 떼어 놓는 크나큰 결단을 하신 것이었다. 학창 시절 중 그때 내가 공부를 제일 잘해서 반에서 5등 안에 들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던 증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내 목 뒤에 큰 흉이 하나 있다. 한창 시험 공부할 때 뾰루지가 하나 생기더니 큰 사과 하나만큼 커져서는 곪았다. 후발조라고 그러던데 종기의 일종이다. 그걸 잘라 수술을 해야 하는데 시험 공부하느라고 손을 못 대고 그대로 키우고 말았다. 아픈 게 또 곪고 또 곪고 하더니 나중에는 ‘근이 배긴다’고 하듯 딱딱해졌다. 목 한가운데 종기는 위험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프다고 하면 수술할까봐 사뭇 나는 안아프다고 하면서 그걸 안고 다녔다. 결국 입학 시험을 치르고 합격이 된 다음에야 수술을 했다. 그러나 흉이 남고 말았다.

그때의 자취집이 누구 집이냐 하면 지금 남편의 친척 여동생 집이었는데, 그 친구는 무남독녀 외딸이었다. 그때 남편은 대전고등학교에서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하고 3년 차이니까 그때 대전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가 날마다 제 오빠 자랑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 하나는 남편하고 비오빠 비동생 사이라나 하면서 또 자랑을 하곤 해서 나는 노상 도대체 그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하루는 제 오빠가 왔다고 친구가 부산을 떠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른 문 틈으로 살짝 내다보았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이, 머리는 얼마나 큰지 모르겠고, 이마는 툭 튀어나온 남자가 커다란 군화를 신고 -육이오 사변 뒤니까- 교복은 누렇게 바랜 것을 입고, 모자는 군인 담요로 만들었는데 역시 누렇게 바랜 데다가 여기저기 막 꿰맨 것을 쓰고 서 있었다. 나처럼 멋내기 좋아하는 사람이 볼 때는 거지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는 오빠인데, 그렇게 자랑을 하길래 은근히 보고 싶어했던 오빠인데,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그 양반이 뒤에 내 남편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에야 어찌 알았으랴.

대전여고에 들어가면서부터 나한테는 연애 대장이라는 소문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키가 커서 우선 남들의 이목을 끌기 쉬운 데다가 온갖 멋을 다 내고 다녔으니 그런 소문이 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소문이었다. 그 무렵에 해수욕이라는 게 큰 유행이 되어서 사람들이 대천 해수욕장이니 신탄진 해수욕장 같은 데를 많이 갔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그런 델 못 가봤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엄하셨는데. 남들이야 쉽게 연애 대장이니 하고 떠들었지만 실상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손수 다림질하고 교복 바지 안에 누비 바지 입기도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나 멋낼 만한 것은 오로지 교복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 사복을 입고 나쁜 짓을 한다든지 하는건 감히 생각도 못할 때고. 머리를 뒤로 묶었는데, 나는 그 묶은 끝을 싹 올려서 꽃모양을 해갖고 다녔다.

여름에는 치마를 입었지만 겨울에는 바지를 입었는데 그 바지란 것이 완전히 몸빼 바지였다. 예나 이제나 나는 하체에 살이 없어서 엉덩이도 납작하고 다리도 가늘었다. 교복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비비 틀어지기 일쑤였다. 볼품있게 하느라고 아버지 누비 바지를 속에 입고는 그 위에 교복 바지를 입고 다녔다. 교복 바지는 그냥 입나? 주름을 잘 잡아야 바지 앞 선이 탁 서서 반듯하게 된다. 가는 다리로 바지를 두 개씩 입고, 하나는 주름 세우느라 신경쓰면서 다니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그때 하도 질려서 지금도 나는 여행할 때 말고는 바지를 안 입는다.

또 칼라는 항상 하얗고 풀을 되게 먹여서 빳빳하게 했다. 다림질은 꼭 내가 했다. 어떤 사람은 부모가 다려 주기도 하고, 또는 다리기 싫으니까 풀을 먹여서 장독에 갖다 놓고는 말려서 그걸 그냥 떼어서 달아 입는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리면 반질반질하지를 않다. 그게 싫어서 나는 꼭 다리미로 다렸다. 칼라도 내가 직접 몇 개씩 미리 만들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든지 빳빳한 새 칼라를 달수 있게끔 하고 다녔다.

나는 교복이 둘이었다. 보통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곤 하는데, 나는 옷이 구겨지는 게 싫어서 내가 교복을 새로 하나 만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갈 때 내가 만든 교복을 입고 가서 학교에서는 또 다른 교복을 입고 지내다가 집에 올 때는 다시 내가 만든 교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그렇게 까다로웠다. 바지도 두서너벌씩 만들어 놓고는 늘 갈아입었다. 하나만 계속 입고 다니면 바지 앞주름이 흐트러지는데 그게 싫었던 것이다.

그걸 다 내가 했다. 어머니도 안 해주셨지만 나는 그때부터도 다른 사람이 내 옷을 해주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옷은 꼭 내가 해야 돼서 언제든지 내가 만들어서 내가 다림질하고 입었다. 지금도 난 내 옷을 누가 고쳐준다 하면 싫다. 양장점에서 가봉을 해서 옷이 크고작고 해서 고치면 안 입고 만다. 그러니 우리 집 손님들도 옷이 잘못됐으면 언제든지 새로 해준다. 잘된 걸 손님이 자꾸 고집을 하면 어떻게든 납득을 시키지만, 내가 봤을 때 정말 잘못됐으면 완전히 새로 해준다.

그러고 다녔으니 고등학교때는 대전여고 최고 멋쟁이로 꼽힐 정도였다. 그렇게 멋을 내고는 집에서 대전여고까지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다녔다. 때로는 한 정거장이지만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는데, 어쨌든 하루 종일 걸어다니다 보면, 또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남학생들도 많이 만나게 되고, 그러노라면 따라오는 남학생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누구하고도 말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대전에는 사범학교며 공업학교도 있었고, 공사생도들, 육사생도들도 있어서 대전여고 학생들하고 미팅을 하자며 따라오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들은 영 안중에도 없었고, 잘 따돌렸다. 얼마나 내가 걸음이 빠른지 남학생들도 나를 따라오다 따라오다 못 따라왔다. 그러면 그냥 돌을 차고 욕을 하고는 돌아가고 그랬다. 약국집 딸이 돼서 참 건강했었나 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따라 다니던 남학생이 있었는데, 지금 남편하고 결혼할 때까지 따라다녔다. 그 학생이 연애편지를 준 게 사과 궤짝으로 몇 궤짝 될 정도였다. 육이오사변으로 피난갈 때부터 그렇게 따라다녔는데, 그 학생은 유성에 살았다. 그래서 유성에 사는 내 친구를 시켜 편지도 전해주고 했지만 나는 진짜 말 한 마디도 안 해봤다.

x그 애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점점 대담해져서 비가 오면 우산 속으로 들어와서 5분만 만나자 할 지경이 되었다. 3학년이 됐을 무렵에 한 번, 하도 유성에 사는 내 친구를 졸라서 냇가에서 만났다. 친구는 좀 떨어져 앉아서 누가 보나 망을 보고, 나는 걔하고 둘이 손수건 두 개 양쪽에다 깔고 앉아서 얘기를 했다. 왜 그렇게 자꾸 나를 귀찮게 하느냐, 그런 정도였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그래도 연애한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신한국당 이한동 고문 부인 조남숙 여사와 영화얘기 즐겨



 

여고시절 맨 뒤 오른쪽이 이리자 선생. 앞줄 맨 왼쪽에 이한동 씨 부인인 조남숙 여사가 보인다.
여고시절 맨 뒤 오른쪽이 이리자 선생. 앞줄 맨 왼쪽에 이한동 씨 부인인 조남숙 여사가 보인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나는 클럽을 만들었다. 비너스라는 이름이었는데, 홍성철, 박인숙, 한인순, 서임원 같은 친구들이 모였다. 그 전에도 그랬듯이 친구들은 다 공부 잘하고 예쁜 애들이었다. 남들은 나보고 사람도 차별 안 하고 성격이 두루두루 좋다고 그러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차별이 심한 편이다. 지금도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 좋다. 또 뭐든지 시작하면 끝을 보려고 하고, 뭐든지 일등을 하려고 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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