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되어 날으리!
꽃씨되어 날으리!
  • 글·안혜성 그림·이경신
  • 승인 2017.09.27 15:26
  • 수정 2017-09-27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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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예요. 백민홍. 사랑은 분명히 존재해요. 게다가 우린 그 사랑을 진실로 소유할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도 있고요. 우리의 생명과 삶 자체 역시 누군가의
그러니까 이 우주의 절대자가 보여주시는 사랑의 증표임에 분명할 테고 말이요.”

책가방을 되찾은 감격은 물론 이웃의 선행에 잔잔한 감동을 맛본지도 한 달 남짓 된 십일월 초 어느 날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선한 이웃에 대한 생생한 기억도 흐려졌던 그날 민홍은 단풍잎과 함께 가을의 정취마저 스러진 교정을 산책하다가 강의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초겨울의 감상(感傷)을 즐길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휴강임을 알면서도 ‘사회구조론’강의실을 찾아 든 것이었다. 다음 주에 쟝 쟉크 루소에 대한 리포트를 써서 담당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발표해야 할 차례였기에 그녀는 시험성적으로 대체될 리포트 작성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장학금을 따내기 위한 편법으로 학업에 매달리는 자신이 서글펐지만 민홍은 마음을 추스리며 책을 펴들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천재적 사상가요 문학가이며 계몽주의자였던 ‘루소’의 삶에 그녀가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와 동거녀 사이에서 얻은 다섯명의 자녀를 양육원에 보낸 자신에 대해 만년에 후회했다는 그였건만 <에밀>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자녀 교육에 대한 일가견을 폈던 이율배반적인 한 인간의 삶 속에서 민홍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을 재확인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회 불평등이론을 제기했으며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그의 연보를 읽고 있을때였다. 요란스레 강의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깜짝 놀란 채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를 놀래킨 것이 미안한 듯 뒷머리께를 긁적이면서 객쩍게 웃고 있는 남학생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 서고 있었다. 순간 모범생 타입의 남학생의 옷 차림새를 바라보면 민홍은 탄성을 삼켰었다. 무엇엔가에 가슴이 치받힌 듯 둔중한 충격탓이었다. 청바지위에 걸쳐 입은 그의 검정색 점퍼가 눈에 익었고 짧게 깎은 머리 모양새도 눈에 익었다. 어머! 기연(奇緣)에 대한 놀라움으로 내려 앉은 가슴자리에 미세한 설레임과 반가움이 맞물려 돌며 소용돌이쳤다. 민홍은 즉시 그를 알아 보았었다. 그녀는 삐죽 웃고야 말았었다. 그가 즐겨 입었던 스웨터의 하트형의 땜질구멍을 통해서 그의 가슴 속을 들여다 본 듯한 기이한 부끄러움을 느꼈던 스웨터 임자가 바로 그였기에. 그가 김성직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그녀 먼저, 민홍은 인사를 건넸었다. 그녀 멋대로 상상했던 그의 영상과 스웨터가 주었던 신선한 느낌이 한데 어우러지자 기묘한 희열이 가슴 가득 차올랐기에. 그러나 그녀를 향해서 뜻모를 미소를 건네 준 그는 그대로 흔연히 책을 펼쳐드는 것이었다. 때문에 조바심하면서 다시금 말을 걸었던 쪽은 그녀였었다. 그의 상대적인 무관심과 그를 향한 그녀의 친숙한 느낌 사이에 버티고 있는 간극(間隙)에 대한 초조함 탓이었을까?

“저어… 혹시… 사회 구조론 시간이… 휴강인데…”

“오, 그렇습니까?”그제야 그는 돌아 앉으며 민홍의 질문에 응대했었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었다. 그날 아침 그는 휴강인지 미처 모르고 허겁지겁 강의실로 달려 왔었노라고. 이유는 지난 한달 동안 입원해 있다가 이틀 전에야 퇴원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대를 며칠 앞둔 지난 여름 동료 군인들과 축구를 하다가 그만 동료와 부딪쳐 넘어지면서 왼쪽다리의 무릎관절을 크게 다쳤던 까닭에 입원까지 했었노라며 그는 친절하게도 입원 사유까지도 알려 주었었다. 일차 수술 당시 뼈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박아 넣었던 열세개의 못을 이번에 제거했다는 얘기에 민홍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그녀의 가방을 들어다 주었던 날 왜 친위대 장교처럼 무릎을 굽히지 않은 채 걸었으며 지난 달 그가 교정에서 감쪽 같이 사라진 사연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때늦은 인사가 되었지만… 지난 번 도와 주신 일 감사드려요.”

되돌아 앉는 그에게 민홍은 급히 그의 선행을 치하했었다.

“아, 치하를 받을 일이 못돼요. 가방을 들어다 주겠노라고 청할 셈으로 가방주인을 한동안 기다렸지만 그대로 다음 강의실에다 가방을 옮겨 준 어설픈 선의가 두고 두고 마음에 걸렸으니까요. 나 역시 그날 무릎이 몹시도 아파서 나를 돕는 셈 치고 그쪽의 가방을 들어다 주었을 뿐 다른 저의는 없었는데…”

그는 다시금 돌아 앉은 채 책을 펴들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김성직이 타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는 점을 민홍이 간파했던 것은. 김성직이 건네주는 냉랭한 분위기와 함께 그같은 거리감을 의식했던 그녀는 그 거리감을 깔아뭉개버릴 것처럼 그에게 한걸음 더 가까히 다가섰다. 자신의 이름을 애써 밝히면서…“아. 내 이름은 민홍이예요. 백민홍.”

“미농? <마농 레스꼬>의 여주인공 이름을 연상 시키는 이쁜 이름이군요.”

어떻든 그날 민홍은 ‘자신을 돕는 셈치고’그녀를 도왔노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에게서 황황히 발걸음을 되돌리려는, 그의 겉도는 분위기에 흘린듯이 끌려 들어 갔었다. 남자들로부터 도망치기 일쑤였던 그녀의 도피심리보다 한 수 위인 듯한 그의 타인 기피증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공격욕구를 자극했던 것일까.

“마농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세요? 나는 <마농 레스꼬>의 저자인 아베 프레보가 내렸던 사랑에 대한 정의를 기억할 적마다 묘한 무력감을 느끼는데요.”

민홍은 그녀의 독서 수준이 그의 것 못지 않음을 과시하고 싶은 치기만만한 경쟁심에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마농 레스꼬>의 저자는 얘기했었죠. ‘사랑이 많은 기적을 낳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사랑을 신성(神聖)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제서야 그는 아예 그녀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으며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민홍을 직시했다. 순간 섬광처럼 빛나는 그의 눈빛에 흠칫 놀랐던 민홍은 그만 시선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그쪽은, 아니 백민홍양은 그렇다면 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랑의 위대한 능력을 믿지 않는단 말이예요?”

“사랑따윈 사람들의 기대와 염원의 산물, 그러니까 허구에 불과하겠죠.”

민홍은 싸늘하게 웃으며 맞받아 쳤었다. 사랑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기를 앙망하지만 결코 손안에 쥐어지지 않는, 아니 그러쥘 수도 없는 추상적인 삶의 상태 내지는 생의 가치를 묘사할 뿐 다만 말로만 존재하는 낱말들이 사랑말고도 얼마나 더 많은가. 자유, 만주주의, 정의, 인간애, 우정, 행복 그리고 신뢰등등.

“아니예요. 백민홍. 사랑은 분명히 존재해요. 게다가 우린 그 사랑을 진실로 소유할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도 있고요. 우리의 생명과 삶 자체 역시 누군가의 그러니까 이 우주의 절대자가 보여주시는 사랑의 증표임에 분명할테고 말이요.”

이제 사태는 반전(反轉)되었다. 그녀가 아니라 그가 그녀의 추적자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에게 도전했다.

“동료들과 축구를 즐긴 대가가 그토록 가혹한데도 그 고통 역시 창조주께서 내려 주신 사랑의 표시라고 믿고 있단 말예요?”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 곁으로 다가 앉았었다.

“물론 고통을 겪고 있는 순간에 아픔의 뜻을 긍정하기란 어려워요. 사실 그 못들을 뼈속에 박아 넣었을 때나 빼내었을 때 마취제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통증을 이길 셈으로 두손을 마주 잡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양 손등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허나 이 무렵의 고통을 통해서 내가 많은 것을 배웠음 또한 솔직히 인정해야 겠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사랑을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고통만큼 대단한 스승이 없다는 걸 새삼스레 실감 했으니까요. 생명과 건강의 중요성을 그것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야 역설적으로 배웠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내 생명이 0.3밀리의 짚신벌레처럼 약하게 느껴졌…”

그러나 그녀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기이한 순간이 그때 찾아 왔었다. 김성직은 결코 해서는 안될 얘기를 털어 놓은 듯 입을 다물고는 어색한 미소로 다음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민홍은 그의 눈빛에서 절실한 고뇌의 흔적을 목격했다. 그녀가 곤혹감에 빠진 찰라 그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어떤고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양인 듯 두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그의 목에 시퍼렇고 굵은 힘줄이 불끈 일어섰다. 그가 간질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민홍은 경악했다.“ 어디가 아프세요?” “아니요!” 오히려 그녀의 질린 모습에 놀란 듯 그는 서둘러서 주섬 주섬 책을 챙겨든 즉시 강의실을 빠져 나갔었다.

며칠 뒤 그녀는 김성직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을 얻어 들었다. 그가 목사를 부친으로 둔 ‘예수쟁이’이요, 1980년오월의 사태직후에 강제징집이 되었던 경직된 정국(政局)의 피해자라는 사실 등이었다. 그녀는 시인해야만 했다. 그의 순진한 모습과 첫만남의 자리에서 그녀로부터 황황히 멀어져 갔던 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그녀가 혼돈과 아울러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음을. 그 이후부터였으리라. 갈증에 시달리면서 민홍이 누구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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