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여성과 가족주의, 동양은 정치이슈에 집중
아일랜드 골웨이서 31개국 92개 작품 공연. 한국의 정신대 연극에 기립박수

지난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아일랜드 골웨이에선 ‘제4회 세계 여성연극회의 및 연극제’가 열렸다. 영어 명칭으론 ‘세계여성극작가 회의’라고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여성 극작가들의 작품 공연, 포럼, 희곡 낭독회 및 토론 등 다양한 형식의 여성연극 회의와 연극제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연극제에서 50여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이사회의 한국대표 이사인 필자는, 한국의 정신대 문제를 증언형식으로 다룬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허길자 작·홍민우 연출, 극단 빛누리 공연)를 공식 참가작으로 추천, 함께 참가했다.

필자가 정신대 문제극을 추천하게 된 동기는 해외 문화계에도 이 문제의 실상을 알려야 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해외의 여성계나 문화계 및 학계 등에서는 우리가 국내에서 생각하는 만큼 이 문제에 관한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국가적 정체성’으로, 세계화, 지구화라는 경향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국의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제가 금세기의 중요 당면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바, 여성연극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31개국의 여성 극작가들의 92개 작품이 다양한 형태로 공연되었다. 이번 연극제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작가인 92세의 메어린 맨닝의 <가요, 사랑스러운 로즈>.

이 초청작은 케네디가의 명성을 탄생시킨 로즈 케네디의 인간적 자아추구의 꿈, 아버지의 반대로 인한 좌절, 전통적 여성역할과의 타협 과정등을 바탕으로 꾸며진 그의 자서전적 작품이었다. 아마도 케네디가가 아일랜드 출신인 사실과 초청작품의 내용이 연결되어 있는 듯 싶었다.

독특한 표현 형식으로 호평을 받은 공연은 독일의 여성 극작가 크리스 파울의 <그녀의 어머니의 딸>로 모녀관계의 양면적 심리관계를 표현주의적 수법으로 표출했다.

이 행사의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유색인종 여성극작가들의 작품들이 눈에 띄고 있는데, 탄자니아 극작가이자 배우인 쉴다 랑게버그의 <챠가랜드의 마이자>는 아프리카 사회를 배경으로 흑인여성이 가부장적 편견과 억압을 극복하고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을, 무용·노래·연기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줌으로써, 공연성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미국 여성극작가 도로시 루이스의 <사랑의 응어리>는 부부간의 심리적인 힘의 관계를 게임형식으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연극제의 예술감독인 앤헤닝 죠슬린 남작은 서양의 여성연극 작품들이 다시 여성주의와 가족주의와의 가치관의 조화를 모색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반면, 동양의 작품들은 정치적 주제가 그 특징이라고 출품작들의 경향을 분석했다.

그의 분석대로, 인도의 극작가인 수시마 데슈판디는 인도의 한 여성운동가의 삶의 투쟁 과정을, 인도네시아의 라트나 사룸펫은 <마쉬나>라는 작품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억압을 그렸다.

한국의허길자작<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 역시 일본군 성노예 문제로 다른 아시아 국가의 정치적 작품 경향과 맥을 같이 했다.

실제로 한국의 정신대문제 공연은 아일랜드 주최측의 협조와 한국측의 끈질긴 홍보 노력으로 이 연극제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넌즈 아일랜드’라는 소극장에서 공연됐는데, 정신대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군 만행의 실상은 여성 인권과 인간 권리의 침해라는 차원에서, 이 연극을 관람한 연극관계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고발성 연극에 대해 그들은 공연이 끝난 후 전원 기립박수로 그들의 도덕적 지지를 포현해주었다.

공연 다음날, 이 연극의 고발실상은 많은 연극제 참가자들에게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우리측의 이번 연극제 참가는 여러 차원에서 의미가 깊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국제적 여성문화의 장에서도 우리의 입지를 확립해야 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2천년에 있을 다음 회의와 연극제에는 더 많은 수의 여성 극작가들과 연극인들이 참가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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