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레저를 얻기 위해 일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는 인생을 ‘노동+레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직 레저속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말한 레저란 음악과 사색.

바캉스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프랑스인들은 장기적인 휴가를 즐긴다.

그들의 바캉스는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는 시간’이다.

시계를 들여다 보지 않는 시간. 한적한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몸과 마음을 쉬는 것을 최고의 바캉스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숲속에 푹 파묻혀 지내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이제 바야흐로 휴가철.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베낭메고 산으로, 비행기타고 해외로, 텐트치러 바다로.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어디로, 무엇을 하러 떠나는 것일까.

남이 가니까 무작정 나도 떠나가는 ‘미 투(Me Too)’식 바캉스는 아닌가.

애써 고생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처럼‘유명한곳,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만 찾아간다.

그래서 결국은 돈과 시간을 버리고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마치 의무방어전을 끝내고 그로기 상태가 된 권투선수처럼.

우리나라의 바다와 산은 여름철이면 콩나무시루가 되어 몸살을 앓는다.

이름난 해수욕장은 대중목욕탕 유사품으로 전락한다.

바다와 산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편리함만을 위해 산과 바다에 쓰레기들을 두고 떠날 것인가. 파도에 둥둥 떠다닐 비닐, 종이부스러기들…

인생을 한가로이 즐기는 소박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직업은 이발사, 이름은 푸지.

어느날 푸지앞에 회색옷 차림의 낯선사나이가 나타난다.

사나이가 말했다.

“우리인생을 70년이라고 한다면 네 인생의 전시간은 22억7백52만초이다.”

푸지가 놀라 감탄했다.

“아니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다 나의 것인가?”

그 사나이가 비웃었다.

“잠자는 시간, 일하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 영화보는 시간, 술 마시는 시간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똑같은 설교를 했다.

모두들 ‘갑자기’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아껴야 해. 시간을 아껴야 한다구!”

그래서 그들은 바쁘게 뛰어 다녔다.

아이들이 놀자고 해도 아버지는 바쁘다며 거절했다.

아이들이 책을 읽어 달라해도 어머니는 바쁘다며 거절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의 입버릇 “바쁘다, 바뻐”도 이렇게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인생을 놓칠까봐 바쁘다고 뛰어 다니는 것이 결국은 시간을 잃어버리는것.

이제 우리도 휴가철 시간표를 짜야 할 때다. 시계를 들여다 보지 않는 시간. 참다운 쉼의 시간.

지혜로운 사람에겐 고성능 보청기가 장착되어 있어서 몇천년전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다시 한번 더 들어보자.

참다운 쉼이란 ‘음악과 사색’이라고 했던 그.

귀를 조금 더 크게 열면 파도소리도 들릴 것이다.

처얼썩, 처얼썩…

제발 올여름엔 사람들이 파도를 슬프게 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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