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여성성 긍정이 우주적 에너지의 근원임 설파

40,50대 여성 시인들이 일제히 봇물을 터뜨렸다.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세계사)를 출간한 김정란(45)씨,〈불쌍한 사랑기계〉(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한 김혜순(43)씨,〈빠지지않는 반지〉(문학과지성사)를 선보인 김길나(57)씨,〈바닥이 나를 받아주네〉(창작과비평사)를 내놓은 양애경(42)씨가 바로 그들.

이들 신작시집들은 각각 상이한 시세계를 선보이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글쓰기의 주체인 여성에 대한 정체성의 탐구, 여성성의 천착, 그리고 시세계의 원숙함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먼저〈그 여자...〉의 시제목에서 보이는 ‘입구’는 시인 자신의 말을 빌자면 “ ‘나’의 이상적 자아를 현실의 내가 따라가지 못하자 내 안의 나는 ‘입구’에 먼저 도달해 나를 돌아보며, 그러나 재촉하지는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다. 김정란씨의 시는 사회적 여성인 시인이 내면적 여성의 또다른 나와 끊임없이 화해하고 서로를 찾아나가는 여정으로 읽힌다.

시인은 또 말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확실한 맥을 낚아챘다. 그리고 더이상 남자들이 무섭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여자의 간곡한 말을 듣는 것이 세계에 대한 배반이 아니며, 남자들을 내 삶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가장 많이 여자가 됨으로써 여자가 아니라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같은 시인의 생각은 떡장수 엄마와 호랑이 전설을 패러디 한 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여 나를 먹고 싶니 먹어라 뭐 까짓 거 또 태어나면 되지 뭐...나는 이제 쓸쓸하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서 천 개의 태양과 천개의 달이 뜨고 지는걸 나는 단 하나 사랑의 끈만 잡고 놓지않는다 세계여 난 너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 이 사랑에 지치지 말게 하라’

‘(여자의 말-세기말, 적극적인 죽음’부분).

한편, 육안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우리를 둘러 싼 시공간을 마치 내시경이나 현미경의 렌즈처럼 세밀하게 보여주며 그것을 지켜보는 고통이 우리들 욕망의 가시화임을 보여준 김혜순시인은 독특한형식과 화법으로 세계를 끌어안는다.

‘여성은 자신의 몸 안에서 뜨고 지면서 커지고 줄어드는 달처럼 죽고 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본다...나는 사랑하므로 나 자신이 된다. 나는 사랑하므로 내 몸이 달의 궤적처럼 아름다운 만다라를 이세상에 그려나가기를 바란다/이 사랑은 태곳적부터 여성인 내 몸에서 넘쳐나오고, 그리고 거기서부터 고유한 실존의 내 목소리가 터져나온다’‘(프랙탈, 만다라, 그리고 나의 시’부분).

김길나씨는 순환적인 사유방식, ‘물’과 ‘불’의 다양한 변주와 결합으로 생명과 우주를 노래한다. 그에 의하면 물은 가장 힘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의 특성을 가장 많이 가진 존재가 바로 여성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사회가 물이 흐를수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그의 시세계는 물결치는 바다로 확장된다. 또 하나, 김길나 시인의 시는 재미있고 기발하다.

‘배에 생식 주머니 하나씩을 볼록하게/ 달고 다니는 숫놈 해마들, 암컷의/알을 받아 숫놈이 새끼를 낳는다/사력을 다해 분무기처럼/새끼들을 확확 뿜어낸다/아버지가 잉태해 낳은 자식들/인식의 변혁으로 소동하는/은빛 분수가 눈부시게 치솟는다/어디 해마 같은 남자 없을까’‘(해마를 보러간다’부분).

마지막으로 양애경씨의 시는 여성적 자아탐구가 자신의 생활과 삶을 부단히 반추하고 성찰하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다른 관찰이 돋보인다. 가령 ‘그렇군 나는 여자였군/생리 심한 날 하얀 변기 한쪽에/무겁게 가라앉은 피를 보며 그래 나는 여자였지’라는 구절처럼 그의 시에는 시인이 자기 육체를 발견하는 낯설음과 제도적인 여성의 육체에 대한 시각의 거부 등이 구석구석 자리잡고 있다.

나아가 ‘세상에 꿈도 많고 고집도 세었던/제일 귀염받던 곱슬머리 계집애’인 내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사람이 늙는다는게 슬프고 무서워서/다시는 살아있는 이모를 만나지 못할까 무서워서’라는 내용의 ‘이모에게 가는 길’이란 시를 보면 시인이 발견한 여성성이 어떠한 것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즉, 그는 다른 여성의 육체의 성쇠를 통해 자신에 내재해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고 이를 애정 어린 포용력으로 끌어안으며 다른 모든 타자에 대해서도 같은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들 여성 시인들의 작품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화해’의 마음이다. 이것은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특질인 동시에 온 우주를 끌어안는 거대한 에너지이다. 이들 시인은 사소사를 통해 이 우주를 형상화하고 나름의 또 다른 우주를 창조하며 여성만이 가진 생명의 잉태력을 눈부시게 그것도 이들 시인들의 나이가 도달한 삶에 대한 원숙하고 너그러운 목소리로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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