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09.27 18:40
  • 수정 2017-09-27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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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 한복 짓는 등 천부적 소질 보여
어머니 곁에서 바늘에 실 꿰어드리며 바느질과 자연스레 친해

할머니가 사변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되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할아버지는 이후 재혼을 안하시고 구십 장수하시도록 평생을 혼자 사셨다- 우리식구는 시골로 돌아갔다. 고향에는 소작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우리는 다시 안채로 들어갔다.

고향집에는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온 집안 사람들이 다 몰려왔다. 사촌과 팔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가서 살던 친척들, 대전에서 살던 사람들까지 다 우리 집으로 왔다. 원체 집이 넓고 먹을 것도 없지 않았으니 그랬을 게다. 그렇게 해서 방 한칸씩에 나누어 살았다. 심지어는 사돈들도 우리 집으로 왔으니, 지금 기억나는 이가 셋째 작은어머니의 여동생의 가족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어도 크게 불편한 줄을 몰랐던 것 같다. 그때 소작인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행랑이니 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따라서 집안일은 모여든 사람들이 나누어 했다. 그런 식의 시끌벅적한 모듬살이가 주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았던 듯 싶다. 울 밖의 세상은 험하고 시끄러웠지만 우리 집 뜰 안에서 이루어지던 일상은 전쟁 전과 크게 달라진 바 없었던 것으로 내게는 기억된다.



인심 잃지 않은 아버지 덕에 일가 모두 무사히 살아남아



아마도 그 평온함의 가장 큰 원인은 아버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바로 인민군이 들어왔고, 집이 워낙 넓다 보니 그들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이른바 접수라는 걸 하려는 것이었다.

그 시절은, 겪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참으로 인심이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인민군들의 행패도 행패지만 그보다도 마을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번 인심을 잃으면 그만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선대부터도 그랬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마을에서 인심을 잃지 않고 계셨다. 우리 고향에 논 산이 얼마 안됐기 때문에 좌익들이 참 많았고, 사람들이 허다하게 죽어나갔다. 사실 나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죽는지도 몰랐다. 그저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이 죽어 사라진다는 사실에 태반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저 경악할 따름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부모님은 행여 내가 그런 것을 알까봐, 관심을 가질까봐 항상 조심하셨다. 그러나 소문이란 것이 어디 고인 샘물이던가. 넘치고 흘러 항상 귀에서 귀로 떠돌아 다니는 것이 소문이 아닌가. 누구 오빠는 뒷산에서 빨치산한테 죽었고, 좌익 세력들이, 같은 동네 사람들이, 부모가 인심 잃은 집 아들을 데려다가 총살해서 죽이고, 부르주아라고, 무슨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이라고 또 죽이고.

참으로 알 수 없으면서도 크나큰 다행인 것이 우리도 따지고 보면 지주 계급인데 일가에 그렇게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소가가 많은데 말이다. 우리 고향 마을에서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우리 일가는 다 무사히 그 어려운 시절을 지났다.



아마도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입은 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들도 치료해 주셨고, 곡식 같은 것도 나누어 주셨다. 그 어렵던 시절에 소를 잡았다고 고기가 들어왔던 기억도 있으니, 아버지는 만인 앞에 평등한 의술로써 우리 일가를 보호하신 셈이었다. 물론 아무런 고생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 시절에 다른 사람들이 당하던 고초에 비하면 우리 식구는 큰 고생 안하고 살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전쟁의 참상을 내 눈으로 보았다. 내가 직접 그런 고초를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 눈으로 본 것 만으로도 나는 전쟁의 끔찍하고도 황폐한 속성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인민군이 향안리에 주둔하자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 여자들은 여성동맹이란 걸 만들고, 남자들은 또 남성동맹이란 걸 만들어 훈련을 시켰는데, 자꾸 나보고도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어릴 때 소풍도 안보낸 양반들이, 그런 데 딸을 내보내려고 하셨겠는가.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나는 성격이 하도 별쭝맞아 그런지 사실 약간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저녁이면 마루에 서서 발끝을 들어올려 담 너머를 내다보곤 했다. 우리 집 담은 높아서 뛰어오를 수도 없었지만, 마루 끝에서 보면 밖이 조금은 보였다. 우리 집 대문 바로 앞에 큰 냇물이 있었는데 넓었다. 냇물 앞에는 공회당이 있었는데 거기에 마을 사람들이 여자고 남자고 모여 웅성거리고 노래도 부르곤 했다. 여자들이 빨치산 노래를 힘차게 부르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구경하다 어머니한테 들키면 난리가 났다. 아마도 어머니는 저녁이면 내내 나를 감시하느라고 피곤하셨을 게다.



전쟁중에 대전가다 다리폭격

심장 두근두근 증세생겨




아마도 그 모임에 빠질 요량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전쟁통에 웬일인지 사촌동생들하고 대전을 왔다갔다 했다. 대전서 향안리까지는 백리가 넘는 큰 거리인데, 동생들하고 걸어서, 숨어 다니면서 대전을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오가면서 시체를 수도 없이 보았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게, 길 가에 널부러진 흑인들 시체였다. 미군이었을 게다. 길 가에도 있고 물내려가는 데에도 있고. 그 시체들 위에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슬쩍 덮어놓은 것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목숨이란 게 저렇게 비참하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비감에 빠지기도 했다.

한번은 그 이은구라는, 내 수족같던 동생하고 대전을 가는데, 공습이 시작되었다. 대전에 유천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막 그 다리께를 지날 무렵이었다. 길을 지나다가 폭격이 시작되어 우리는 얼른 다리 밑으로 들어갔는데, 그 다리를 부술 작정을 했던지 집중 포격을 하는 것이었다. 냇물에 폭탄이 떨어져서 모래가 확 일어나고 세상이 부옇게 흔들렸다. 내 머리와 가슴까지 부들부들 흔들리는 중에 다리가 동강이 나는 걸 보았다.

아마도 내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증세가 그때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심장병은 아닌데도 때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큰소리만 나도 깜짝 놀래고 심장이 뛰는 증세가 있다. 바느질 일을 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는데, 바느질이라는 게 일이 없을 때도 있고 많을 때도 있다. 여름에는 일이 좀 없는 편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한 칠팔십명 직원이 있었다. 바느질하는 사람, 수 놓는 사람, 금박 찍는 사람 등등인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먹고 살아야 하고, 그걸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나다. 그러면 일이 많아도 걱정이 돼서 두근거리고, 없으면 없는 대로 이 사람들 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두근거리고. 이렇듯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곰곰 생각해 보면 이 증세는 바느질하면서 생긴 게 아니라 어려서 다리 폭파되는 걸 보았을 때 비롯된 게지 싶은 것이다.



가마니 깔고 앉아 공부한 여중 시절

바느질 참맛 알게돼




어쨌든 큰 탈 없이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대전으로 올라왔다. 대전여중 2학년에 복학이 되어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정작 학교는 사라지고 없었다. 폭격을 맞았던지, 아니면 군인들이 학교 건물을 썼던지 정확히 기억에는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무슨 제사공장을 빌려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공부했다.

내가 바느질을 제대로 하게 된 게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2학년 때부터 교복을 내가 만들어 입었으니 말이다. 육이오 사변이 나면서 미군 부대에서 옥양목들이 흘러나와 시중에 퍼졌는데, 보통 이불 호청을 하던 그 옷감을 가지고 나는 교복을 해 입고 칼라를 만들어 붙였다.

내가 직접 교복을 만들어 입은 것은 무엇보다도 도무지 교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 키가 다 큰 사람인데, 그때 1미터 63센티미터였다. 지금도 작은 키가 아닐 텐데 그 옛날에야 오죽했겠는가. 그런데다 말라서 교복이 헐렁하니 모양이 안 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도 교복 칼라를 시커멓게 해가지고 다니는 애하고는 놀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교복 차림이 꾀죄죄하고 칼라가 더러우면 사람같이 보지도 않았다. 그 시절에 우리가 멋부린다는 게 뭐겠는가. 나로서는 최대한 교복을 깨끗이 예쁘게 손질해서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뽀란이니 하는 좋은 옷감들이 많았다. 홑이불 만들려고 어머니가 장만해 두신 미국 옥양목 따위를 내가 잘라서 교복을 만들었다. 너무 헐렁하지 않고 품에 맞으면서 허리를 쏙 들어가게 한 교복이었다. 아마 그 시절부터는 내 옷은 거의 내가 다 만들어 입었지 않나 싶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손에 익혔다. 의식적으로 배웠다기보다도 어머니가 바느 질하는 동안에 옆에 앉아서 바늘에 실도 꿰어 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것 같다. 어머니가 워낙 바느질을 좋아하시고 잘하셨다. 아마 그 핏줄의 영향도 클 것이다.



모시적삼, 약제사 혼례복 망쳤지만 어머니께 실력 인정받아



좀 커서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내가 기억하기로 한 3학년 정도밖에 안 됐을 때인데,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다 놓으시면, 예컨대 깃 같은 것을 달아 놓고 잠시 손을 놓으시면 내가 얼른 동정도 달아 놓고 했다.

한번은 국민학교 3학년 때인데, 어머니가 모시 적삼을 베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내가 가위로 베다가 싹 쓸었다. 깨끼를 끊어내는 걸 깎아낸다고 하는데, 깎아내는 깨끼를 잘못해서 내가 겉을 다 베어 놓은 것이다. 그 길로 작은댁으로 도망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우리 집에 있던 약제사가 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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