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홍은 김성직이 남긴 짧은 글을 세번이나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씹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친 데 대한 아쉬움 탓이었다. 왜 그는 미리 만남을 약속하지 않는 걸까.

2.엇갈린 걸음들민홍이 친구들과 함께 과 연구실에서 언론사 취업을 위한 일간지 사설 분석을 마쳤을 때는 밤 8시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윤미희 등에 비해서 일년이나 뒤늦게 스터디 그룹에 합류한 터라 친구들의 명쾌한 논리 전개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만 친구들의 여유만만한 취업 준비를 부러워하면서. 민홍은 겉으로는 여유를 부리는 척했지만 내심 잔뜩 조바심하고 있었다. 간사직 낙방때문에 창졸간에 언론사 지망생이 되어버린 터라 편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계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오후만해도 그랬다. 그녀는 윤미희와 박희숙과 함께 올 한해 동안에 일어 났던 주요 국내외 사태에 대한 일간지의 사설 논조를 비교하다 말고 엉뚱하게도 시국에 대한 호된 언쟁에 휘말려 들었었다. 이를테면 윤미희는 현재의 군부 통치체제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던 반면 민홍은 친구의 안일한 시국관을 논박한 격이었다. 박희숙은 친구들의 불꽃튀는 접전을 관망했다. 물론 자신의 의견은 침묵으로 감춘 채였다. 한 시간을 그렇게 허망하게 낭비해 버린 셈이었다.

“난 너네들처럼 한가하게 토론을 즐길 처지가 아니잖니. 이만 가봐야 겠어.”

민홍은 서두르며 일어섰으나 이번엔 친구들의 감칠맛 나는 유혹에 덜미가 붙잡혔었다. 과연구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박희숙이 뜨거운 커피와 먹음직스런 도우넛을 내어오자 이에 질세라 윤미희 역시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오곡밥을 보온도시락째 들이 민 것이었다. 어차피 저녁밥은 먹어야 하잖아? 윤미희네가 마련한 즉석 먹거리 파티까지 즐긴 뒤에야 민홍은 도서관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도서관 역시 성탄절과 세밑의 계절을 타는 것일까. 적잖은 공부 벌레들이 여느 때 보다 일찍 자리를 뜬 탓인 듯 도서관에는 학문의 열기 대신 적막감이 감돌았다. 민홍이 가쁜 숨을 가누며 시사영어책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책갈피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메모지였다. 도서관을 비운 새 누군가가 다녀간 걸까? 호기심과 아쉬움을 느끼며 민홍은 급히 쪽지를 펴보았다. 시원스럽고 커다란 필치로 쓴 글발이 눈에 익었다. 김성직이 남기고 간 것임에 분명했다.

백민홍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나 보지? 민홍이의 명물인 자주색 가방덕분에 민홍이 자리를 찾아내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가방 주인은 보이지 않더군. 승리의 쾌감은 낭패감으로 변했음은 물론이고. 삼십분 가까이 기다렸건만 도대체 민홍이가 돌아오지 않으니 이대로 돌아갈 수밖에!

내가 왜 불쑥 민홍이를 찾아 왔는지 궁금하지? 다만 민홍이가 보고 싶었거든. 강의실에서 매일 마주치던 사람을 종강탓에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고역이란 걸 뒤늦게 실감하고 있어요. 성탄절이 다가오자 괜스레 지기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지도 모르겠고. 그럼 언젠가 다시 도서관에 들를께요. 만일 우리의 걸음이 또 다시 엇갈린다면 그땐 새해, 그것도 졸업식장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는지. 참, 이달 말 부터 강원도 집에 내려가서 파묻힐 것 같아요. 침묵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거든요. 진로문제로 또 다시 휘청대고 싶지도 않고. 아쉽지만 재회는 훗날로 미뤄야 겠어요. 그럼 안녕. 좋은 세월 보내길 빌어요. 성직.

민홍은 김성직이 남긴 짧은 글을 세번이나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씹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친 데 대한 아쉬움 탓이었다. 왜 그는 미리 만남을 약속하지 않는 걸까.

그가 우연한 마주침을 가장한 자연스런 만남을 원하기 때문일까. 그는 행여 내게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부담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왜 그는 기묘한 갈증과 아쉬움을 내게 떠안길까.

민홍은 두 손으로 이마를 고인 채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자 시야 하나 가득 어른대는 것이 있었다. 언제나 가슴에 따스하게 젖어드는 김성직의 순직한 눈매와 미소였다. 그녀는 어느새 조우는 아니었을 만남의 사연을 되새기고 있었다.

민홍이 복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김성직을 눈여겨 보게 된 사연은 그가 즐겨 입고 다니는 스웨터 때문이었다. 그 스웨터 가슴께에 나 있는 ‘하트’형의 땜질 구멍이 건네주는 조금은 우스운 느낌과 아울러 외모에 무신경한 무던한 성격이 그녀에게 친밀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친밀감은 요즘 세상에도 기운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그의 핍절한 가정환경에 대한 그녀의 동류의식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뿐. 그의 차림새에 대한 기분 좋은 느낌은 그러나 스웨터 임자에 대한 호감으로 까지는 비약하지 않았었다. 허나 군복무중에 이러구러 동정을 잃은 데 대한 자격지심 탓인 듯 유독 순진해 보이는 여대생과 직장 찾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여느 ‘복학생’같지 않은 그를 민홍이 지켜 보게 된 사연은 스웨터와는 전혀 무관한 돌발 사태 때문이었다.

작년 시월 그러니까 1983년 어느 가을 날이었다.

그날 민홍은 창졸간에 상처 투성이로 변한 몸을 끌면서 오층 지붕밑방에 있는 ‘사회구조론’강의실까지 올라가느라 한바탕 곤욕을 치뤘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그녀의 몸이 하룻밤 사이에 만신창이가 된 까닭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몰래바이트 탓이었다. 그 전날 밤 강남에 사는 고교생에게 불법 과외를 해주고 나오다가 그만 고급 대리석 아파트 계단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그대로 굴러 떨어지면서 양팔꿈치는 물론 양쪽 무릎에 호된 타박상을 입었던 것이었다.

국법(國法)을 어긴 체벌을 받는 셈 치자며 욱신거리는 통증을 가까스로 참아내면서 ‘사회구조론’속강(續講)을 내리 두 시간 들은 직후였다. 마침 윤미희가 그녀를 복도로 불러 냈었다. 여자 친구들 서너명과 함께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룹 스터디’를 해보면 어떻겠는가고 민홍의 의사를 물어 온 것이었다. 허나 민홍은 대학 입학 직후부터 학자를 꿈꿔왔던터라 윤미희의 제의에 대한 답을 미루고는 강의실로 되돌아 왔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다음 강의실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자리로 되돌아온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당 강의실 책상위에 놓여 있어야 할 그녀의 책가방, 그러니까 낡았지만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어깨에 멜 수도 있는 왕년의 명품(名品)이 감쪽 같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어머! 너희들 채권장수 가방이라고 놀리던 내 가방 못봤니? 그녀는 정신없이 강의실 안팎을 헤집고 다녔건만 가방의 행방은 묘연했다. 난감했다. 요절한 아버지가 남긴 몇점 안되는 유품인 그 가죽가방은 결코 분실해서는 안되는 값진 보고(寶庫)였다. 게다가 가방 안에는 값비싼 사회학 원서(原書)는 물론 불법 과외용고교 모의고사 시험지가 들어 있었고 영작(英作)공부를 한답시고 시국을 비판해 놓은 어설픈 영문 에세이 한편, 그러고도 초라한 돈지갑과 ‘아점’용으로 먹어치운 도시락통마저 어김없이 버티고 있었느니 가방의 분실은 끔찍한 재앙일 수 밖에! 시국이 시국인지라 교정에 상주해 있는 기관원들의 손에 영문(英文) 수필과 과외용 시험지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그녀는 시국사범으로 몰릴 게 뻔했다. 그녀는 지혈이 된 무릎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고통에 신음을 삼키면서도 ‘홍보과학관’이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민홍은 그 때 탈취범의 뒷모습을 목격했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짧게 머리를 올려 깎은 문제의 남자는 기이하게도 불안한 걸음으로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의 가방과 자신의 것을 양 손에 나눠 든 채. 민홍은 그의 차림새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었다. 학생티를 낼 셈으로 챙겨 입은 청바지 위에 걸쳐 입은 상의가 모 기관으로부터 일률적으로 지급되었을 검은색 점퍼가 아닌가. 그는 학원가로 투입된 정부의 하수인에 틀림없었다.

“이봐요. 이거 보라구요. 내 가방 내놓아요. 그거 내 가방이란 말예요.”

허나 그는 힐끗 뒤돌아 보면서 그녀의 가방을 흔들어 보였을 뿐 그대로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낭패감과 되찢어진 상처의 고통에 울먹이면서 화장실에 대충 상처를 수습한 뒤 이미 수업이 시작된 ‘통계학’강의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그녀는 탄성을 터뜨렸었다. 방금 전 눈 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가방이 맨 앞 책상위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가방을 되찾은 기쁨은 곧 낯선 이의 이웃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변했다. 허나 그 감격은 다음 날부터 상실감으로 대체되었다. 그 미담의 주인공을 교정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기에!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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