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되 전략적으로 선별, 크게 싸워라”
70년 도미, 노스웨스턴대 석사취득, 첫 직장 ‘이중 언어학교’거쳐 노동국장으로

얼마전 아주 재미있는 제목의 여성 입지전이 출판되어 야심있는 여성들과 딸을 잘 키우고 싶은 아버지들의 관심을 끌었다. <뚝심좋은 마산 색시 미국 장관 십년해 보니>라는 이 책은 전신애씨가 1970년 미국으로 가서 일리노이주의 노동국장이 된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책 제목이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아직 우리나라에는 중앙정부에만 장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 정부 노동성 장관이면 노동국장 정도가 더 정확한 번역이 아닌가?

“일리노이주는 시카고가 주청 소재지로 미국에서도 상당히 크고 중요성이 높은 주다. 장관보다는 낮을 지 몰라도 국장보다는 큰 규모다. 재미있는 일은 한국에 오니 여성들은 날 국장이라고 부르고 남성들은 장관이라고 부르더라.”(웃음)

- 학력을 소개해 주신다면?

“1943년 마산에서 태어나 완월국교와 마산여중고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 살아온 자세한 이야기는 <마산 색시.>에 다 있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자. 인간 관계가 좋은 비결은 무엇인가?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니 사람을 아낀다. 막 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는 편이다. 줄 때는 보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혜택받은 출신이라는 것 아닌가?

“어머니가 거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가족인데다 집안 친척들, 친구들, 공장 식구들까지 모두 우리 어머니가 세세히 보살폈던 기억이 난다. 넉넉 하다기 보다는 아껴서 베푸셨다. 내가 지금 잘된 것도 그런 어머니의 음덕이 아닌가 생각된다.”

- 첫 직장이 ‘이중 언어학교’라고 쓰셨는데.

“그렇다. 1976년 33세때였다. 미국가서 우선 아이 둘을 낳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집에서 영어를 익히고 있었다. 둘째가 다섯살이 되자 뭔가 하고 싶었다. ‘이중 언어학교’는 미국에 온 소수민족들의 정착과 언어 교육을 도와 주는 기관이었다.”

- 그 곳의 담당자인 기엘모씨가 전장관의 인생에서는 훌륭한 역할을 한 인상을 책에서 받았다.

“그렇다. 그는 수줍은 성격인데도 어머니가 의사셔서 그런지 강한 성격의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가르치기를 좋아했고 나는 배우기를 즐겨했으니 기막히게 잘 만난 인연이었다.”

- 의사소통은 잘 되는 편이었나?

“영문과를 나왔지만 영어가 잘 될리 없었다. 처음 갔던 동네의 이웃들이 좋은 분들이라서 생활영어는 이분들과의 생활에서 저절로 익혔다. 남편이 나보다 먼저 미국에 가있었는데, 내가 도착하자 영어가 아니면 대답을 안했다. 미국에서 살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영어로 된 성경책을 통독을 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열심히 배웠다. 텔레비젼의 연속극도 열심히 보았다. 영어연습을 하고 싶으면 백화점에 가서 물건사는 척하고 점원들과 영어로 말하는 기회도 가졌다.”

- 영어 학습의 비결이 있다면?

“무조건 해 봐야 한다. 언어는 용기가 절반이다. 실수하면서 배운다.”

- 백인 사회에서 주눅든 적은 없었는가?

“우리 부모는 항상 긍정적으로 나를 대했다. 난 내가 좋은 사람이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다고 마구 버릇없이 키운 것은 아니다. 자녀의 좋은 점만 봐준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그런 자신감이 나의 사회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 그래도 늘 칭찬만 받은 생활은 아니었을 텐데.

“물론이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지만 미국에도 좋은 사람이 더 많다.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험,꾸중을 들을 때 나는 항상 그것들을 잘 정리 하려고 애썼다. 내가 받아 마땅한 칭찬이고 꾸중인지를 판단하고 좋은 점은 수용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보충했다.”

- 그래도 저서의 모씨처럼 긁어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럴 때는 내가 피했다. 장기전으로 길게 본다고 생각했다. 지면서 이길 수 있다. 미국 속담에 “미운 자에게는 긴 밧줄을 줘라. 그러면 그것으로 그가 자기 목을 매리라”라는 것이있다. 사회생활을 하자면 싸움을 전혀 안 하고 살수는 없다. 싸움을 하기 전에 판단해야 할 것은 첫째 싸움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 둘째 큰싸움만 하라는 것이다. 미국인은 안 싸우는 것 같아도 싸우는 것을 전략적으로 잘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 감정을 절대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원하는 바를 얻을 줄 안다.”

- 그런 점은 퍽 남성적인 감각이다. 남자가 많은 가족이었나?

“우리 가족은 9남매다. 아들이 셋, 딸이 여섯인데 난 그 중 여덟번째였다. 그런 형제 구성에서 부모님의 관심을 한 번이라도 더 끌고 내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머리를 쓰긴 써야 했을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사업 경영에서 능숙하신 분이셨다. 물론 나도 강했다. 언니들이 비로도니레이스 옷을 입고 물려주는 것보

다 광목이라도 내 옷을 사달라고 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악조건이 더 능력을 향상시켰기 때문에 한국여성들은 유능하다.”

- 어법이나 어휘 선택이 퍽 사려깊다. 소위 ‘정치적으로 치우침이 없는 politically correct’ 언어 구사가 뛰어나다. 선천적인가?

“한국사람들은 말을 강하게 한다. 미국 와서 처음 느낀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익혔다. 미국에 오면 미국식으로 말하고 사고해야 한다.”

- 미국인들과의 파티에 나갈 때 위축감은 안 드는가?

“글쎄, 난 체격적으로 왜소한 편은 아니다. 그리고 건강이나 체력관리를 열심히 한다. 장소와 역할에 맞게 옷도 잘 입으려고 한다. 남편이 항상 ‘전여사답게 입어라’라고 한다.(웃음) 검소하고 정중하지만 당당하게 입는다. 또 여성적인 옷은 안 입는다.”

- 자세도 퍽 품위있다. 보기에 좋다.

“그것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자세도 일종의 보디 랭귀지(신체언어)이다.”

- 업무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비결은 ?

“팀워크를 잘 해야 한다. 내가 남보다 뛰어난 일을 맡으려고 애쓰지 말라. 내가 융합해서 내가 돋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그러나 갈등도 있을텐데.

“물론이다. 그러나 윗사람에게 가서 고자질하면 안 된다. 갈등을 빚는 사람은 나하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그런 성격을 다 알고있다. 그러니 결국 정리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두번 이용당하고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내 편에서 조심은 하고 지내야 한다.”

- 노스웨스턴 대학 석사학위가 도움이 되었는가? 한국 학생들은 아이비리그만 선호한다.

“미국 정부의 고관들은 아이비리그보다 지방대학 출신이 더 많다. 어느 대학출신인가보다는 당사자의 능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미국사회다. 하버드 나와도 신통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학벌만 우수하고 실무 경력이 없는 것이 큰 문제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는 교수들이 자문위원회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데 미국은 오히려 사업인들이 많다. 현장을 모르고서는 자문이 안된다.”

- 사업인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한 자문이나 판단을 할까봐 그런 것이 아닐까?

“미국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 분야 사람들을 고루 섞어 정책을 다룬다. 건설 부문이라면 건설업자, 엔지니어, 전문학자, 지역사회인, 정부 담당인 등 각계의 이익을 대표하고 다른 지식을 보유한 사람들을 골고루 참여시킨다.”

- 우리나라도 그렇게 형식은 갖추기도 한다. 그러나 예스맨을 주로 선발하는 경우가 많다.

“행정인이야말로 똑똑해야 한다. 주변에 직언할 수 있는 사람도 두어야 한다. 내가 행정을 해보니 사람을 잘 쓰는 것이 행정인의 최고의 덕목이다. 미국 발전의 기본이 공정한 인재 개발이다.”

- 인재 평가는 어떻게 하나?

“업무능력이 좋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시간관리도 잘해야 한다. 오래 일하는 사람이 좋은 직장인은 아니다. 그리고 직원 통솔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공평하고 사심없이 객관적으로 행정을 평가하는 사람이 좋다.”

- 일정이 촉박하신데도 귀중한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돌아가셔서도 계속 좋은 업적을 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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