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09.27 14:48
  • 수정 2017-09-27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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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 독차지하며 멋내기에 유달리 관심 많아
중학 2년 때 6.25 발발, 일가 모두 고향 향안리로 피난

그 사건을 빼고는 여전히 나는 집안의 막내로 사랑을 받으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내가 일곱 살에 시집을 간 언니는 나이 차가 너무 많이 져서 그런지 기억도 별로 없고 지금까지도 크게 정이 없다. 그 점은 언니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부모님에게도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 하나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가 여든 일곱에 중풍이 걸리셔서 육개월을 앓으시고 돌아가셨는데, 중풍이 나셨을 때 한 번 전화를 하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전화 한 번이 없었다. 어머니 어떠시냐고 와보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언니는 언니대로 이유가 있기도 할 것이다. 첫손주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 애지중지하면서 키우신 바람에 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몰랐다. 특히 그 집 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고모의 생김새나 성품을 똑 닮았고 큰고모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양오빠 두 분 있지만 어머니는 내가 모셔



우리 어머니는 언니 아래로 아들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죽는 것 보고 하시면서 큰딸에게 달리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도 어른들이 하도 큰딸을 예뻐하시니 어머니로서는 자기 새끼인데도 마음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언니가 더욱 어머니한테 정이 없었던 것 같다.

언니는 퍽 똑똑하신 이로, 두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었는데 아버지가 서울 천일약국에서 약제사로 계실 때-열일곱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형부는 두살 어린 열다섯살이었다. 공부를 많이 하셔서 강경상업학교- 요새로 말하면 서울 상대쯤 되는 학교다-를 나와 나중에는 은행에 근무하셨다. 그 집안이 황해도 개성 부자였다고 하는데, 나는 결혼식이고 뭐고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언니 시집이 국수집을 했는데, 국수를 빼고 나면 그 기계에 개떡 같은 반죽이 조금씩 남곤 했다. 그걸 내가 구워 먹었던 게 기억이 날 뿐이다. 그런데 사돈댁 할머니께서 아가, 그런 건 먹는 게 아니다, 하고 말리셔서 그나마 한두번에 그쳤다.

양자로 들인 오빠도 호적에만 올라 있다뿐이지 함께 살지는 않았다. 그 오빠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김삿갓처럼 떠돌기를 좋아해서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 평생 돈을 벌어 본 적도 없고, 우리 친정재산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그래도 어쨌거나 집안 장손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제사, 5대 봉사 제사를 지내신다.

어머니가 나이 드셔서 내가 어머니를 모셨는데, 사실 우리 어머니는 당신 계실 데가 있고, 혼자 사실 능력만 있으면 딸네 집에 오시지도 않을 양반이었다. 언니고 오빠고 안모시니까 내가 모신 것이었다. 어머니를 모시라고 내가 오빠한테 집을 한채 사드렸더니 어머니를 모시지는 않고 그 집에서 하숙을 치시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모시고 왔다.

그랬어도 오빠는 나름대로 어머니한테 잘하려고 애쓰셨다. 자신이 좀더 번듯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 부모한테나 동생한테 미안하게 생각하고 제사도 열심히 지냈다. 지금에 와서는 언니보다는 오빠한테 친동기같은 정감이 더 가는 게 사실이다.

어렸을 적 생각으로는 오빠는 개구장이고 욕심장이였다. 그저 내 물건 훔쳐다가 자기 동생 갖다준 것만 생각이 난다. 연필이고 공책이고 어떤 때는 심지어 책까지 말도 없이 가져갔다. 어쩌다 한번 오빠가 집에 왔다갔다하면 없어지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속이 상해도 오빠에게 덤비고 대들지 못했다. 그러면 안 돼는 걸로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뒀는데, 이 아들들이 누나한테 한 사람도 항의를 못한다. 덤볐다 하면 아들이라도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우선 첫째가 누나, 그 다음이 형, 그 다음이 막내, 이렇다. 과일을 먹어도 누나는, 누나이기도 하지만 여자기 때문에 제일 예쁘고 크고 좋은 것을 먹는다. 옛날부터 그랬다. 그 다음 큰 것은 큰아들. 그 다음 것은 작은놈이 먹도록 한다. 만일 작은놈이 누나 것을 빼앗아 먹으려고 하면 세 개를 몽땅 거둬서 아무도 안 준다. 그리고는 애들을, 옛날에 큰 캐비넷이 있었는데, 잠그지는 않지만 거기다 가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아무도 못 먹게 했다. 양보가 없으면 그런 벌을 받는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애들이 커서 우리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딸이고 사위고 며느리고 다 모인다. 다 모여서 의논을 하는데, 언제든지 큰딸의 의견이 먼저다. 그래서 그게 합당하면 통일이 되고 아니면 다시 의논을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일 좋은 것은 큰며느리를 먼저 주고, 그 다음 서열이 큰딸부터 시작된다. 며느리란 우리 집에 와서 제일 대접받아야 되는 사람이니까. 그런 집안 풍습이 내 어릴 적부터 우리 집안에 내려오던 것이다.

아무튼 언니도 없고 오빠도 없으니 내 친구들은 내가 무남독녀인 줄로만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나는 외동딸이나 다름없는 사랑을 받고 자라기도 했고.



장녀 대접 안하면 두아들 캐비넷에 감금



나는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못하지도 않아서, 우등상을 타보지를 못해서 그렇지 비교적 상위권에 속한다 할 만한 성적이었다. 공부하는 것보다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쏠려 있으니 특출난 우등생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친구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저 아이들의 시선을 끄는데 더 골몰해 있었던 것 같다. 노상 뭔가를 나눠 주고 먹을 것도 사주고 했는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아무 소리 안하시고 후딱 주셨다. 세어 보지도 않고 주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약값을 적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외상 장부란 것도 만들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었다. 약이란 것은 부모 아니면 부부, 아니면 자식이나 형제들이 먹는 것인데, 그 약값을 떼먹는 놈들은 나쁜 놈들이고, 그런 놈들은 아예 약을 안 준다는 것이 아버지 지론이어서, 아예 장부 따위는 적지를 않으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호인이셨다. 그래도 약국에는 늘 손님들로 북적댔다.

그 바쁜 중에 내가 가서 아버지 돈 좀 주세요 하면, 바쁘시기는 하고 급하시기는 하고, 사랑하는 막내딸 청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냥 돈을 주신 것 같다. 어쨌거나 내가 돈을 받아 넣고는 학교에 가려고 약국을 나서면 꼭 밖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 집 앞에 집이 한 채 있고, 공동우물이 있고, 바로 위에 철로가 있었다. 요새는 서대전, 원대전으로 역이 나뉘었지만 그때만 해도 서대전 역만 있어서 집이 역 근처였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래 걸어가다 보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길목을 지키고 서 계신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돈 준 것 내놔라 하셨다. 내가 꾀가 있고 약을 것 같으면 좀 감춘다던지 했을 텐데, 나는 어려서부터도 그런 거짓말을 못했다. 지금 나이 먹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럼 그만 그 돈을 홀랑 다 뺏기고 마는 것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큰돈을 갖고 다니는게 영 마땅찮았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주신 돈을 거의 다 뺏고는 조금만 남겨 주셨다. 그러면 나는 또 그 돈을 얌전하게 받아 오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다 집어내 버렸다. 내가 밥을 굶는다 하면 어머니가 애를 태우신다는 걸 알고 떼를 쓴 것이었다. 도시락을 집어내 버리고 도망가면 어머니가 못 따라 오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나는 오늘 굶어요, 하고 시위를 하는 셈이었다.

그럴 때면 번번히 약제사가 점심 도시락을 자전거에 싣고 학교에 가지고 왔다. 아가, 와서 밥 먹어라 해도 절대로 나는 밥을 안 먹었고, 그러면 약제사는 할 수 없이 그 밥을 그대로 가지고 갔다. 그럼 내가 실제로 굶었을까. 한 번도 밥을 굶어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여지껏 나를 놀리는 소리 중에 하나가 ‘배꼽시계’라는 것이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서 나는 끼니를 거를수가 없었다.

우선 친구들 도시락을 얼마든지 얻어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 먹을 것 많이 사주면서 관리를 잘해 놓은(?) 덕분에 돈이 없어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또는 조금 있는 돈으로 무엇이든 사먹었다. 그리고는 굶은 체 하면서 며칠을 어머니를 약을 올리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게 어머니에 대한 복수였던 셈이다. 어려서 그 짓을 밥 먹듯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 속 썩여드릴려고 작정을 했던 것 같다. 하여간 아버지는 그렇게 주시고, 어머니는 그렇게 돈을 못 쓰게 하셨고, 나는 도시락 내던지고, 그게 내 일과였다.



친구들 도시락 덕에 어머니께 도시락 스트라이크



내 친구들은 주로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들이었다. 부모님 때문이기도 했는데, 일등하고 이등하는 아이들 외에는 절대로 같이 놀지 못하게 하셨다. 또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면 으레 부모님이 뭐하시냐, 집안이 어디냐, 이런 것들을 물으시곤 했다. 나로서는 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딸자식 하나 있는 것, 귀하게 키우고 싶어하셨던 마음인 듯 싶다.

어머니는 시험을 볼 때면 꼭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우리집에 불러 함께 공부를 하게 하셨다. 맛있는 음식도 장만해 놓으시고, 떡이니 튀밥이니-그때는 튀밥도 참 맛있는 음식이었다- 준비를 하시고는 공부하는 틈틈이 날라다 주시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 정성을 생각하면 공부를 좀 더 잘할걸, 하는 후회도 든다. 그러나 내 관심은 공부보다는 멋내는 일에 더 쏠려 있었다. 이 얘기는 좀더 뒤에 하기로 하자.

1949년에 나는 대전여중에 입학했다. 해방 전만 해도 일본인 학교가 있고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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