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만 주어도 누군가는 아버지가 되는데 혹 씨를 주는 그 아버지가 기죽을까, 정말 몇 년 전 이 사회는 엄살을 떨었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요즘 그 아버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모든 것을 도맡아야 비로소 어머니가 되는 여성들, 때로는 강력한 마더가 되기를 자처하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필자는 말뿐인 ‘여성의 시대’처럼 왠지 요즘의 마더의 시대가 불길하다.

얼마 전에 폐막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모성에 대한 수많은 영화들은 지금까지의 복잡한 현실인 모성의 문제에서부터 앞으로의 자궁이 교환되는 대리모 문제까지 ‘마더의 시대’를 질문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영화 ‘마더’에서부터 자식을 버렸을지라도 씨를 준 아버지를 이해하는 자식의 요구를 들어야만 ‘인생이 아름다워질 것 같은’ TV 주말 드라마까지, 마더에 대한 질문은 오늘내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자식들 모르게 (살인이든, 희생이든)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마더 뒤에서 많은 자들은 안심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안심은 그 마더의 역할에 공모하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물론 (기를 수 없어) 미리 낙태하는 마더, (출산한) 아이를 죽이는 마더, (자신이 기를 수 없어) 입양을 보내는 마더, 아이와 함께 죽는 마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아이를 미루거나 낳지 않는 마더들의 문제는 사회적 징후로서 부각된다.

그러나 그 근본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여성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그녀들은 칠칠치 못한, 가혹한, 준비되지 않은 못된 엄마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가위 눌리며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대중매체들은 강권하며 그 죄의식이 광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원정 출산하는 마더, 불법 찬조금을 모으는 마더, 아이들의 수행평가 과제를 해주는 마더, 학교의 모든 힘든 일들을 도맡아서 해주는(이것은 학교의 강권 사항이기도 하다) 마더, 성인 자녀의 성·결혼 문제를 대신 상담하는 마더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마더들은 괴로워하기보다 그렇지 못한 마더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결국 죄의식이나 부러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마더의 시대’를 불길하게 만드는 중요한 조건들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의 책임과 경쟁을 재촉하는 신자유주의시대에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만능 해결사 마더가 그리 부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치매 걸린 엄마를 누군가에게 간절히 부탁할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과 만나면서 필자의 오만은 위축된다. 그렇다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마더의 시대를 불길하게 하는 거머리는 ‘자식’인가? 아니면 ‘숨어있는 또 다른 존재’인가? 결국 자식을 통해서만이 인간이 되는 어머니들의 삶을 여성들이 서서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곧 꽃 한 송이를 들고 가는 어버이날이 머지않았다. 꽃을 사는 ‘자식들’은 어버이의 무엇에 감사하며 무엇을 기대하는지, 과연 어떤 어머니와 아버지를 꿈꾸는지를 질문할 때다. 동시에 마더의 시대에 마더를 어렵게 하는 ‘숨어있는 또 다른 존재들’이 무엇인지 모습을 드러낼 때다. 물론 진정으로 ‘여성들’이 스스로 마더 (안) 되기를 진단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앞으로의 어머니들이 우울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마더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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