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당장 사과하시오.”

민홍은 서슬퍼런 철옹성 선배의 기세에 한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과잉반응 앞에서 그녀의 이성이 예리한 발톱을 세우는 것을 감지했다.

“적어도 저는 제 자존심과 양심에 따라서 솔직한 느낌을 털어 놓았을 뿐 다른 저의는 없었습니다. 사과는 거부하겠습니다.”

“아니, 후배.”

울화증을 삭이지 못한 예비 재벌이 식탁을 밀어 젖혔다. 달려올 셈인가.

“이거 봐요.”

“제게는 백민홍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습니다.”

“좋아요! 백민홍 후배. 톡톡 튀는 개성미를 지닌 여자가 남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색시보다야 더 매력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후배는 무분별한 언행으로 모든 선배들을 모독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군. 여성미란 겸손의 미덕으로 치장되었을 때에야 제 빛을 발한다는 상식마저 모른단 말이오?”

예비 재벌의 명쾌한 논리에 민홍에 대한 반감이 반감된 듯 나이 지긋한 선배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한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좁혀진 성(性)의 대결을 그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민홍은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 외로웠다. 외로움은 이내 그녀를 방관하고 있는 듯한 여자 친구들을 향한 배신감과 얼크러졌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여학생이 있었다. 외교관 지망생인 진숙이었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는데요. 저는 백민홍 학우의 의미있는 발언에 동의합니다. 남의 인격과 바람을 무시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으니까요.”

“아니, 이거 여자 후배들이 선배들을 성토하기로 작당이라도 한 거요?”

민홍의 충고자를 자처했던 김선배가 손에 들고 있던 맥주잔을 식탁에 내리꽂자 허연 맥주거품이 민홍의 손등에까지 튀어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김성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와 선배 사이로 뛰어든 것은. 식은땀이 굴러 내리는 김성직의 창백한 안색을 목도한 민홍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언젠가 그를 처음 만났을때 목격했던 적이 있는 예사롭지 않은 그의 안색과 눈빛이 가시처럼 아프게 가슴에 꽂혔다. 김성직의 모습에 민홍과 선배가 각기 주춤 멈춰선 순간 교수인 오학연 선배가 김선배의 팔을 붙잡았다.

“김선배님, 참으십시오. 달나라를 정복한 이시대에도 이 나라 사람들의 여성에 대한 해묵은 편견만은 여전하지 않습니까. 이 같은 통념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여자 후배들의 고충을 이해해 주셔야 옳잖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후배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여 보자고 우리들이 모처럼 이자리를 마련한 것 아닙니까?”

“아. 오학연이 자네 말 잘했어. 그래뵈도 훈장이 최고다, 최고. 자, 이렇게 언쟁도 해보고 그도 안 되면 맨주먹으로 탁상이라도 치다 보면 정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웃으며 잘살 수 있는 묘수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

박동민 동창회장이 너털 웃음을 웃으며 화해자로 나섰다. 양진석 선배가 이에 합세했다.

“백후배의 개성적인 소개법은 이를테면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고도의 기사작성법에다 견줄 수도 있잖을까요? 그러니 이 같은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튀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귀를 기울여 주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 하겠구요. 더욱이 후배들의 발언을 우리들이 얼마나 겸허하게 경청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본다면 백후배의 따끔한 지적 또한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 양기자 얘기도 일리가 있지. 그래 모두들 잘났다 잘났어. 자, 우리 여자 후배들을 위해서 우리 건배하자고.”

이제 남자들은 모두 동지로 어우러지며 맥주잔을 치켜 들었다. 민홍은 승자의 아량을 과시하는 그들의 모습을 외면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 남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한판의 치열한 접전장에서 도망친 듯한 떳떳찮은 느낌 탓일 터였다. 패배감을 삭일 양으로 그녀는 눈으로 김성직을 찾았다. 예사롭잖은 그의 건강에 대한 염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도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민홍을 향해서 엷게 웃어 준 그는 강단에 서서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간담회가 당면했던 최대의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비록 남녀의 의식 사이에 버티고 있는 불화와 이견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근원적인 해결책 대신 그들은 미봉책으로 위기의 순간을 땜질한 격이었지만.

“지금까지 인권주의의 기수인 백민홍 과우의 독특한 소개를 들으셨습니다.”

김성직은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중단되었던 모임의 순서를 계속했다.

“아니 남녀평등이니 여권주의니 떠들어대는 것은 자신의 불행을 사사건건 사회와 남자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일부 무책임한 여성들의 전유물 아냐?”

어느 중년 선배가 민홍을 향한 적개심을 ‘무책임한 여자’들에게 돌렸다.

“여권에 관한 한 이 나라는 아직도 후진국이 아닙니까? 오죽하면 임산부들이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아본 다음 매해 수만명이 넘는 여아 태아를 모태에서 지워버리겠습니까? 이미 깨져버린 남녀출생 성비(性比)에 대한 보고서를 접하면 우리 남자들도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지요 뭐.”

두 자매를 둔 오학연 교수의 예리한 지적에 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교수를 ‘딸딸이 아빠’라고 이죽거렸던 김선배 역시 머쓱해진 듯 입을 다물었다. 술렁대던 분위기가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딸만을 둔 선배들이 적잖은 모양이었다. 지금껏 자신들과는 무관했던 여성들을 향한 선입견이 막상 그들의 딸자식들의 장래 문제로 좁혀지자 딸을 가진 선배들의 표정은 착잡하게까지 보였다. 그들 역시 이나라 대다수 여성들이 당면한 현실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 순간 김성직이 분위기를 되살릴 양으로 불러낸 듯 작곡가 지망생인 차은철이 기타를 든채 강단 위에 올랐다.

“저희 후배들은 이 저녁에 조금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 종강을 했기 때문이겠구요. 또한 과연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는데도 사년이라는 짧잖은 세월의 파도더미에 떼밀려서 낯선 해변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도 저희들을 심란하게 하고요.”

복학생이요 첫사랑의 연인을 불치의 질환으로 잃었다는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한 차은철이 재학생들의 불안증을 대변해주면서 기타의 코드를 짚어 나갔다. 음악을 통한 영혼의 교감만이 불화의 틈새를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그는 학과 야유회에서도 불렀던 적이 있는 ‘방황’이라는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난 모르겠네. 내가 누구인지.

난 알 수 없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난 말을 못해. 너를 사랑한다고.

다만 알고 있지. 나 먼길 가야 하는 걸.

아, 이젠 떠나야 해. 홀로 가야 할 그 길.

나침반도 이정표도 없는 그 길을.

은철형이 흐느끼듯 부르는 노래는 민홍의 혼에 서럽게 파고 들었다. 그녀 역시 내일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모른 채 학창생활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아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판이었다. 이때다 싶었다. 지금 자리를 뜨는 것만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동통(疼痛)은 물론 그녀에 대한 어색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울 선배들과 이 모임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것이었다.

난 모르겠네. 내가 누구인지…

이제는 중년 선배들까지 목청을 돋우었다. 그럴 것이었다. 허무한 느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기와도 같은 인생살이의 지병일 터이기에. 이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이견의 골은 윤창의 선율로 점차 메워질 것이었다. 이제 그들의 노래는 교가와 응원가의 합창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들은 어깨 동무를 한채 교문앞 맥주집으로 달려 가리라. 민홍은 허리를 굽힌 채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출입문을 향해서 조용히 발을 옮겼다.

복도에 발을 내딛던 그녀는 야밤의 모진 북풍에 흠칫 몸을 떨었다. 민홍은 비수를 들이대는 듯한 혹한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뒤따라 나온 김성직이 그녀를 배웅해줄 것 같은 느낌 탓이었다. 허나 내밀한 바람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김성직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듯한 서운한 느낌에 가슴이 시렸다. 낙엽처럼 그녀는 거센 북풍에 등을 떼밀린 채 학창생활로부터 내쫓겨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졸업이후에 겪게 될 세파의 바람에 대한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문을 향해서 내달렸다. 상서롭지 못한 예감으로부터 달아날 셈으로.

<다음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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