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대장·참외서리 단골, 예쁜 그릇 보면 사족 못써
유년 추억으로 외국 나가도 부부 커피잔은 필수 쇼핑품목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보스 기질이 있어서 애들을 끌고 다니길 좋아했다. 집에 쌀이 많이 있으니까 튀밥을 잔뜩 튀겨 놓고는 동네 애들을 집에 몰아 넣고 조금씩 조금씩 주면서 나를 따르게 한다든지, 초등학교 때에도 그 귀한 아코디언을 사 주면, 우리 사촌이 스물몇명인데 그 사촌들하고 동네 아이들을 죽 모아 놓고 그 앞에서 내가 아코디언을 켜곤 했다.

외숙모가 서산에 계셨는데, 거기서 어리굴젓이니 오징어를 많이 가져오시곤 했다. 그 시절에는 참 귀한 것들이었다. 그러면 그걸 내가 죽 내놓고, 집에 있는 백분, 감초, 계피 이런 것도 죽 해놓고- 아버지가 한의학 공부를 하셨으니까 한약재가 참 많았다- 그렇게 살림을 갖춰놓고는 이를테면 왕비 노릇을 했다. 그러면서 애들이 내 말을 따르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걸 그렇게 좋아했다. 이발 기계를 사가지고는 머리가 보기 흉한 애들은 머리도 깎아줬다. 상고머리도 얼마나 잘 깎았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새색시 혼수감 구해 춤, 연극, 굿놀이판 벌여

어린 눈에 또 시집오는 신부들이 해오는 혼수가 그렇게 예뻐 보여서 동네에서 친척 언니라든지 갓 시집온 신부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좋은 옷들을 내놓게 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그 옷들을 다 입고 고요한 밤이니 하면서 춤도 췄다. 무용이라고는 배워본 적도 없는데 애들을 가르쳐 주면서 말이다. 연극도 하고, 신 내리는 흉내도 내고 별짓을 다 했던 것 같다. 어린 애들뿐만 아니라 같은 동기들도 졸졸졸졸 다 따라오게 하고, 선배 언니들도 전부 나를 다 따라오게 하고, 그런 짓을 많이 했다.

내 사촌 중에 이은구라고, 수학을 전공하고 지금 대전대학교에 이공대 학장인가 하는 이가 있다. 나하고 한 살 차이 지는 사촌 동생인데, 어릴 때 그이가 완전히 내 부하나 다름없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맨날 같이 산에도 올라가고 잠자리도 잡으러 다니고 미역도 감으러 다니면서 돌아다녔다. 내 심부름도 도맡아 했는데, 딱 하나 안 하는 게 있었다.

막 돌아다니다 보면 수수밭도 지나는데, 수수가 익어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걸 보면 나는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 옛날에는 수수를 밥에다 쪄서 먹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그걸 쪄주실 리가 없었다. 아주 가난하고 없는 집에서나 먹는 음식이라는 이유였다. 그래도 나는 그걸 좀 꺾어다가 쪄서 먹고 싶어서 번번이 동생보고 그걸 꺾어 오라고 시켰다. 왜 내가 안 꺾고 늘상 동생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얘가 안 하는 것이었다. 누나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던 아인데. 평생 거짓말 하는 걸 한 번도 못 해본 동생이니 남의 것을 꺾어 오라는 게 영 내키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면 내가 부아가 나서 꺾어다가 집에 갖다주곤 했다. 물론 어머니 몰래 살짝 갖다 줬는데 실제로 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별로 기억에 없다.

한번은 참외밭을 지나다가, 우리집에서 참외 농사 짓는 거 말고 진짜 참외 농사 짓는 집의 밭인데, 그걸 또 자꾸 동생보고 따오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착한 동생은 또 못 따오는 것이었다. 하도 화가 나서 그만 내가 동생을 데리고 밭에 들어가서는 참외를 잔뜩 따가지고 도망을 쳤다. 동생은 조금밖에 못 따고 나는 치마 가득 땄던 것 같다. 그걸 가지고 어디를 가서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런데 나중에 그 참외밭 주인이 돈을 받으러 왔다. 이 집 애기가 그렇게 참외를 따서 그때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있었는데 돈을 달라. 다행히도 할머니 할아버지만 그 사실을 아셨고 어머니는 모르셨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었지만 어머니한테 꾸중 듣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음은 물론이다.

그 동생은 아주 단짝이었다. 내가 배운 책을 가지고 그 동생이 배우고, 또 제 동생한테 물려주고 했다. 집안 형제들 중에서 우리 아버지가 공부도 제일 많이 하시고 생활도 여유가 있고 하시니까 작은 아버지들을 많이 돌보셨는데, 동생들 야단 치시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사촌들이 어려우면 선뜻 그렇게 공부하는 걸, 연필이니 학비니 많이 대주셨다. 또 사촌들도 다 마음이 착하고 고와서 누나 책 받아서 공부하는 걸 고깝게 여기기는 커녕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2학년 때 해방이 됐는데, 그 전에 한창 공출이 심할때 우리 집에서도 그걸 피하느라고 놋대야니 요강, 옛날 유기그릇 같은 것을 우물 속에 많이 집어 넣어 숨겼다고 한다. 내 눈으로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제사 때면 그런 얘기들을 지금도 한다.

양오빠가 부모님 제사를 다 모시니까 자연히 그릇들도 다 그 집에 가 있는데, 제사 때면 그릇을 꺼내 닦으면서 친척들이 모여서 그런 얘기들을 하는 걸보면 실제로 우물 속에 넣었던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렇게 그릇을 넣고는 우물을 메워 버린 사실이다.

구질구질한 아이 집 못오게 하던 버릇 나이 들어도 여전

내가 2학년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대전에 한약방을 차리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시골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나하고 어머니만 아버지를 따라 왔는데, 나중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사짓던 것 다 정리하시고 대전으로 올라 오셨다.

대전 집은 방이 한 열두 칸 되는 큰집이었다. 서대전의 육군병원 근처였는데, 군인이 있는 동네라 그런지 양색시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인근에 양색시한테 세를 안 놓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양색시가 많았을 때도 우리는 방 한 칸을 세를 놔 본 적이 없었다. 방 열두 칸이 남는 게 없었으니, 약도 재어 놓고, 방 서너 개는 전부 행상들이 와서 잠을 잤다. 강경의 새우젓이나 조개젓을 파는 장사치들-대개 여자였는데-을 재우는 방이 하나 있고, 약행상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이 또 두엇 있었다. 약을 가져와서 우리 집에도 넘기고 건재국에도 넘기러 오는 사람들이 늘 우리 집에 와서 묵어가곤 했다. 또 우리 약제사들이 자는 방이 있고. 방을 그렇게 썼지 세를 놓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열두 칸짜리 집이 늘 북적댔던 것 같다. 시골집에서 금순이도 같이 올라왔고, 부엌에서 일하고 살림을 돌봐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이들은 육이오 사변이 나고 아버지가 다 시골 고향으로 보내셨다. 금순이도 그때 고향으로 갔는데,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살다가 남편이 일찍 죽어 혼잣몸이 되었다.

그 시절에 아버지한테 한 번 되게 맞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들이 일본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이 쓰던 살림들을 많이 처분했는데, 그중에 그릇도 있었다. 밥그릇이니 국그릇이니 찻잔을 길에다 잔뜩 갖다 놓고는 파는데, 내가 보기에 너무 예쁘고 좋았다.

그래 어머니 아버지를 졸라서 그 그릇들을 좀 사자고 해도 영 말을 안들어 주시는 것이었다. 망하는 살림을 사면 집구석이 망한다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는 일본놈들 물건을 왜 집에다 갖다 놓느냐는 것이었다. 절대 안된다. 우리 것 뺏아간 것만 해도 많은데, 하시면서 꿈쩍도 안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갖고 싶어서 정말 죽을 지경인데 도무지 쇠 귀에 경 읽기였다.

내가 별쭝맞다고 했는데, 그렇게 사내아이 같은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예쁜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비가 오고 나서 길에 사금파리 같은 게 박혀 있으면 그걸 캐다가 깨끗하게 닦아서 소꼽놀이를 하고, 그 중 예쁜 것은 다 모았다. 나물을 뜯어도 흔히 막 돌아다니면서 큰 것만 골라 뜯는데, 나는 한 군데 자리잡고 앉아 잘생기고 좋은 나물을 골라 한바구니씩 캐곤 했다. 동네 아이들도 남자고 여자고 구질구질한 모습으로는 절대 우리집에 못 오게 했다. 예쁘고 깔끔하게 하고 오라고 했다. 지금도 친구들이 내 가게에 올 때면 내가 신신당부를 한다. 제발 부시시하게 아줌마 차림을 하고 오지 마라. 화장도 좀 하고, 예쁘게 차려 입고 와라. 나를 위해서 모양을 좀 내고 오라고.

예쁜 그릇도 그렇게 좋아해서, 외국에 패션쇼 하러 가면 나는 보석이니 모피니 다 필요없다. 꼭 부부 커피잔 두 개를 산다. 골동품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것을 한쌍씩 꼭 사와서 그 그릇으로 우리 부부가 차 한 잔씩을 마시는 즐거움을 맛본다. 유리 그릇을 또 그렇게 샀다. 요새야 날렵하고 가벼운 파이렉스니 하는 것도 흔하지만 옛날에는 무겁고 둔중한 유리 그릇이었다. 오븐에 넣지도 못하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깨져 버리는 그런 유리를 마냥 좋아서 옷으로 둘둘 말아서 힘겹게 가지고 오곤 했다. 성격이 그런 것이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릇 탐내 돈 훔쳤다가 부친께 모진 매질 당해

그래서, 그 그릇들이 너무나 탐이 나서 나는 아버지 돈을 훔쳤다. 아버지 약국에서 얼만지도 모르고 왕창 훔쳐서는 그릇을 그만큼을 샀다. 그렇게 사고 보니 집에는 가져올 수 없지 않은가. 그제서야 겁이 났던지 동네 친구네 집에 가져다 감췄다.

그새 어디를 어떻게 다녔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밤 아홉시쯤 됐나, 집으로 갔다. 우리 집에 약국에 큰 미루나무가 있었다. 미루나무 바로 밑에는 우물이 있고. 판자로 담을 둘렀는데, 그 판자 틈새로 들여다보니까 미루나무 너머로 마루가 보이고 그 마루 위에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냥 마당을 왔다갔다 하시고.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어 계속 밖에서 서성였다.

그런데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싹싹 비비면서 들어갔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왜 비냐고 하셨다. 돈을 훔쳐다가 그릇을 샀다고, 잘못했다고 말씀드렸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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