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연주자 이지현씨

엄마는 비몽사몽인 채로 유치원 가방과 준비물을 챙기는데, 아이는 영어 교육만화 DVD를 틀어달라고 성화다. 여느 집과 다름없는 ‘아침전쟁’. 가야금 연주자 이지현(32)씨의 2010년 4월 19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조금 생경한 풍경이 있다. 아내를 대신해 남편 박승원(36)씨가 임신한 부인과 아이를 위해 주방에서 진미채 볶음밥을 만들고 있는 것. 지현씨는 ‘25현 가야금 기초 교본(가제)’의 집필을 마무리하느라 전날 새벽 두시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이렇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고 느껴질 만큼 바쁜 날에는, 말하지 않아도 나서서 아내를 돕는 남편의 자상함이 참 고맙다.

오전 8시

“하은아, 유치원 가자”

남편의 도움으로 아침이 조금은 여유로워진 그녀는 9시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는 잠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오래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첫 아이를 가지면서부터 프리랜서로 가야금 연주, 강습, 교재 집필 등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있는 대여섯 시간은 일에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가야금 교재 연구와 교수법 개발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이 날도 오전 내내 교재를 수정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낸다.

남편도 피리나 태평소 등 전통 관악기를 전공으로 한 국악연주가로, ‘공명’이라는 4인조 퓨전 음악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외가 모두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신혼살림을 차린 작은 아파트의 방 하나를 음악 작업실로 꾸몄다. 함께 음악 공부를 하고, 연주 연습을 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지지자이자, 자극제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친 지현씨는 집을 나선다. 평소라면 업무 관련 회의나 개인적인 약속은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마무리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오후 2시가 다 되어 집을 나선다. 그녀는 왕십리의 소월아트홀에서 2주에 한 번꼴로 태교 콘서트인 ‘달콤한 하품’의 무대에 서고 있다. 조선왕실의 태교 방법에 대한 정보와 아름다운 가야금 연주 등의 국악 감상을 접목한 이 공연에서 지현씨는 임신한 왕세자빈 역할을 맡았다.

태교 콘서트는 숙명여대 전통예술대학원 시절의 은사이자 현재 숙명가야금연주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송혜진 교수의 권유로 참여하게 됐다. 2006년 결혼할 당시 숙명가야금연주단의 연주자로 활동하던 지현씨는 아이를 가지면서 2007년부터 연주단의 정식 멤버로는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이렇게 큰 행사나 음반 발매 등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후배들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를 기르고, 임신하고 있는 지현씨가 ‘태교’ 콘서트에 참여함으로써, 관계자들은 공연의 기획 의도를 더 잘 이해하고 진정성을 갖게 됐다. ‘왕세자비’ 역할의 특성상 머리에 쪽을 찌는 등 분장이 쉽지 않아 걱정하던 이씨는 “제가 도와드릴게요”라고 선뜻 나서는 연주단의 후배 박은경씨 덕에 한시름을 던다. 박씨를 비롯한 후배들은 임신 중인 선배를 위해 분장부터 식사까지 꼼꼼히 챙기는 도우미를 자청한다.

 오후 2시

“왕세자비가 되는 시간”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애기씨를 회임한 종실과 사대부의 아씨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나이다.” 방송국 성우 출신으로 공연에서 훈육상궁 역할을 맡은 김희선씨의 인사말로 공연의 리허설이 시작된다. 이윽고 “밝고 경쾌하며 섬세하고 그윽한” 가야금의 선율이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분장을 마친 지현씨는 리허설 내내 후배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뱃속의 소망(태명)이와 대화를 나눈다. 공연 중간에 그녀가 직접 자작곡한 ‘자장가’를 연주하면, 소망이도 신명이 나는지 엄마의 배를 콩콩 찬다. 그녀는 “다른 어머니들은 태교를 위해 뜨개질이나 십자수 같은 손 운동을 하잖아요. 가야금을 연주하면, 귀로는 음악을 듣고 손으로는 현을 뜯으니 일석이조의 태교 효과를 볼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두 시간의 리허설을 마치자 어느덧 저녁시간이다. 휴식시간이 길지 않아 도시락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녀는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맛있고 기쁘게 먹는다. 시장은 무엇보다 좋은 반찬이 되고, 후배들과의 대화는 무엇보다 훌륭한 소화제다.

식사를 하는 도중 아이와 남편이 지현씨를 응원하러 공연장을 찾았다. 그녀는 하은이를 보자마자 엄마와 떨어진 하루가 어땠는지 이것저것 물으며,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땋아준다. 지현씨 부부는 유치원 등 기관을 제외하고는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겨 본 일이 없다.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는 부모와의 정이 유독 강하다.

 밤 10시

“다시 엄마 이지현”

“아빠랑 간식도 먹고, 그림도 그렸어요.” 아이는 아빠와 함께 했던 낮 시간의 일과를 엄마에게 재잘재잘 이야기 한다. 남편 승원씨는 외국 공연 등 장기 출장이 잦기 때문에 여건이 허락하면 틈나는 대로 아이와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본 공연이 시작되자 아이는 “엄마 예쁘다! 이모들(숙명가야금연주단원들)도 선녀 같아요!”라고 감탄을 연발하며 엄마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둥개둥개 둥개야 둥둥둥 둥개야” 경기민요 명창인 이희문씨가 자장가 ‘원주 둥개타령’의 한 소절을 선창하자, 아이는 신이나 목청껏 소리 지르며 따라 부른다. 아빠는 아이의 옆자리에서, 엄마는 무대 위에서 아이의 모습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바라본다.

지현씨와 남편은 함께 하은이의 침대 맡에서 서너 권의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이의 사랑스런 기도를 듣는다. “엄마랑 아빠 아프지 않게 도와주시고, 하은이도 소망이도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엄마로도, 아내로도, 가야금 연주자로도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어떤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 할 거예요.” 욕심 많은 이지현씨의 하루는 아이의 사랑스러운 기도와 함께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