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간 민권·여성운동에 헌신
킹 목사와 60년대 민권운동 주도…40여 년간 흑인여성회 회장
오바마 대통령·클린턴 장관 비롯해 각계 리더들의 추도 성명 줄이어

 

2008년 촬영된 생전의 도로시 하이트의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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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rian Hood
미국의 민권 및 여성운동의 대모로 꼽히는 도로시 하이트 전국흑인여성회(NCNW) 명예회장이 20일 (현지시간) 향년 98세로 타계했다. 워싱턴 DC의 하워드 대학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한 도로시 하이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의 고문 역할을 맡는 등 인종평등과 여성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미국 민권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다.

1963년 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할 당시 단상에 있었던 연사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는 킹 목사 등과 함께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40년 이상 전국흑인여성회 회장을 맡아 흑인 여성의 권익 향상에 앞장서 왔으며 전국여성정치회의(NWPC)를 창립하고 30여 년간 YWCA의 임원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민간인이 받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메달’과 ‘의회 금장메달’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도로시 하이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리더의 추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일 발표한 성명에서 그를 “민권운동의 대모이자 미국인들의 영웅”이라 칭하며 “미국 민권운동이 이룩해 온 모든 업적을 함께해 온 원로들 중 유일한 여성이며 인종, 성별, 배경과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미국을 만들고자 했던 그녀의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라고 고인을 추도했다.

존 바이든 부통령은 “하이트는 1973년 처음 상원의원에 당선됐을 때 나를 찾아준 첫 번째 인물이었다”며 “그는 상대가 누구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데 거침이 없는 친구였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공동으로 추도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은 그를 잃었지만 그의 삶과 그가 이룩한 업적과 그가 감동시킨 사람들로 인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여성운동계 또한 추도 성명을 발표하며 그와 함께 했던 활동을 회고했다. 엘레노어 스밀 FMF(Feminist Majority Foundation) 회장은 “30년간 도로시 하이트와 함께 활동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면서 “그는 항상 여성평등에 대해 강하고, 분명하고, 독특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가 평등을 위해 계속 노력한다면 역사는 분명히 우리 편이 되어줄 것’이라며 항상 우리를 격려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킴 갠디 전 NOW(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회장은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에게 여성 리더십 콘퍼런스를 후원하도록 조언하는 등 여성의 권리가 곧 시민의 권리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그가 항상 말해왔듯 ‘법과 질서뿐만이 아니라 평등과 정의가 함께 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도로시 하이트는 1912년 3월 24일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주 랭킨에서 성장했다. 그가 시민권 운동에 눈을 뜬 것은 고교 시절, 버나드 대학 장학금 취득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에게 할당한 2명의 쿼터가 이미 채워졌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하는 일을 겪으면서부터다. 이후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사업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933년까지 미국의 범죄 판결 시스템의 개선 및 숙박시설의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1947년부터 하이트는 흑인 YWCA 활동에 참여해 활동했으며 NCNW 설립자인 메리 맥레오드 베튠의 눈에 띄어 여성들의 고용과 임금, 교육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1957년 전국흑인여성회 회장으로 선출돼 1997년 85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40년간 모임을 이끈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하이트는 또한 흑인을 위한 시민권 운동뿐 아니라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인종, 지역, 계급을 초월한 전 진영의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특히 그의 기금 모금 능력은 전설로 전해지기도. 시민권 운동계의 리더인 존 루이스 상원의원은 “하이트는 백인 여성들과 유대인 여성들에게도 전화를 했으며 록펠러나 포드 등에서 전화통화만으로 후원금을 받아냈다. 그들 모두는 하이트의 말을 경청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평등을 위한 하이트의 투쟁은 사망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9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 국회의사당에서 몇 블록 떨어진 사무실에서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2008년 전미국영라디오(NPR)와의 인터뷰에서 “민권운동은 끝이 없는 활동”이라며 “우리가 이미 이룩한 것들을 보기보다 현재 산업, 고용기회, 가정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직시하고 정책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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