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외의 모든 남성을 “남자”로 인식하여서는 경쟁자로서든 동료로서든
함께 협조하고 일을 할 수가 없지 않을까? 일에 관한 한 남녀가 아니라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본다.

교통체증이 심각해지면서 지난 수년동안 유행처럼 번진 것이 조찬모임이다. 보통아침 7시나 7시반에 시작하여 9시 이전에 식사를 겸한 회합을 끝내는 것이다. 먼저 양식이나 한식으로 30분쯤 식사를 하고 후식과 커피를 들면서 강사의 강연을 30분쯤 듣고 나서 간단한 질의 응답을 하거나, 의논할 의제가 있는 모임은 토의를 갖기도 하고 친목모임일 경우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다.

조찬 모임의 장소는 보통 시내나 강남에 있는 호텔인데 집을 나서기 전에 식사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간단히 준비하고 6시를 넘어 집을 나서면 대체로 길이 텅 비어있고 차가 쌩쌩 달릴 수가 있다. 집이 서울의 어디이든 간에 대체로 약 20~30분이면 도착 할 수 있고 모임이 끝난후에도 통상적인 업무에 거의 지장이 없어서 참으로 편리한 시간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약속도 이처럼 아침식사때로 하면 시간절약의 효과가 크다.

조찬모임에서 저명한 외국인 강사의 강연을 동시통역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 안보, 외교, 통상, 경제 분야의 전문가가 그야말로 “족집게 과외”나 “원 포인트 레슨”을 해 주는 식으로 짧은 시간에 중요한 내용을 간략하게 짚어준다. 비록 깊이있고 상세한 논의는 못될지라도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앞날을 전망하는데는 “눈이 번쩍 뜨이는”는 길잡이 정보를 많이 듣는 자리이다.

그런데 항상 필자의 입장에서 불만스러운 것은 대다수의 조찬모임에서 여성은 “멸종위기의 동물”이라는 점이다. 기껏해야 참가자 1백명중에 2.3명, 아니면 아예 한명도 없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미국인 강사가 필자에게 청중안에 여성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미국에서는 도저히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장면이어서 참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뭐라 시원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필자는 혼자서 “괘씸하게도 주최기관이 남성 회원들에게만 초청장을 보낸 것인가?”, “기업을 하는 여성도 많고 외교, 안보 분야의 전문가도 많은데 다들 아침에는 주부로서 식구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알면서도 못오는 것인가?”, “화장하랴 옷 입으랴 여성은 외출준비가 남성보다 오래걸려서 이른 아침시간에는 모임에 못온다는 말인가?”, “여성들은 세계적인 추세나 미래의 방향따위엔 관심도 없는 것일까?”등등여러가지로 추측을 해보았다.

그러나 조찬모임을 주최하는 경제단체의 실무자의 설명에 의하면 모임에 나왔으나 그들은 다른 남성회원과는달리 잘 아는 여성끼리가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옆자리의 참석자와도 인사나 대화도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다가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는 또 얼마나 재미가 없을 것인가!

흔히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정부나 경제계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이유로 남성들만의(그것도 끼리끼리의) 밀실 정보교환과 의사결정을 꼽는다. 조찬모임과 같은 공개된 정보교환의 자리에서는 여성이라면 모름지기 “조신하게”처신해야 한다는 한국적인 사회문화적 압력이 다분히 여성의 참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본인만 생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쉽게 넘을 수 있는 장벽이다. 남편이외의 모든 남성을 “남자”로 인식하여서는 경쟁자로서든 동료로서든 함께 협조하고 일을 할 수가 없지 않을까? 일에 관한 한 남녀가 아니라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큰 회의를 위한 동시통역과는 달리 소수인원이 비공식으로 갖는 회의석상에서는 순차통역을 하게되는데 본의아니게 필자가 동의할수 없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옮겨 주어야 할 경우가 있다. 흑인 또는 외국인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편견, 장애인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감, 권력과 부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탐욕, 위험할 정도의 편협한 국수주의, 자신의 아내와 딸을 포함한 모든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경멸…온갖 무지와 편견과 아집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통역사의 의무는 말의 내용을 “판단”할 필요가 없이 단순히 다른 나라말로 옮겨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지를 드러내는 오류나 상대 외국인이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의 말은 다소 편집을 하거나 수정하여 통역을 해줄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렇게 했을 경우 나중에 반드시 본인에게 필자 임의로 삭제, 보충, 수정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중요한 인사들간의 만남에서 수준있고 만족스러운 대화를 집행시켜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데에 필자가 단순한 통역 이상의 꽤 의미있는 조정자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 될 때에는 상당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것을 보면 아마 필자도 요즈음 말로 “공주병”환자인 모양이다.

“여성의 상품화”라는 말은 그리 낯선 말이 아니다. 여성의 몸에 등급을 매기는 미스코리아대회는 가장 공식적이고도 대표적인 경우이지만 연예인도 아니고 술집이 아니어도 나이와 용모가 여성의 채용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공무원의 임용이외에는 사회전반에 통용되는 관행이다.

모 그룹총수가 자기 직원을 “머슴”이라 지칭하여 화제가 되었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는 자기보다 약한자들과 아이들과 여자들을 “아랫것들”로 치부하며 힘과 돈으로 좌우 하려는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이 많다. 문제는 그런 계층이 아직은 정치나 경제분야에서 요직에 앉아 주요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여성신문>을 포함한 많은 여성계 지도자, 단체들이 우리사회의 여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 왔는데 남성독점의 체제와 관행앞에서 “바위에 계란던지기”가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들 때도 많았다. 또 그러한 밀담의 현장에서 여성으로서 이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내용을 통역해주다보면 자괴심도 생기지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머지않아 그런 세대는 어쩔 수 없이 물러가리라는 믿음 속에서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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