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후배, 사회학과 재학생 맞소?”

네? 아! 그런데요? 민홍은 두통과 사랑니의 치통으로 덧난, 간사직 낙방의 후유증으로 달아 오른 얼굴로 선배를 둘러 보았다. ‘김한근’이라는 명찰을 착용한 65학번 선배의 눈길은 그러나 그다지 곱지는 않았다. 아차 싶었다.

“후배,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민홍은 중년인 선배에게 이름을 밝혔다. 그래 백후배는 취업할 계획이 있는거요? 그제서야 민홍은 정색을 하며 선배를 향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선배들이 건네주는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소?”

백번지당한 말씀이었기에 민홍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일러줄 셈이었다. 백민홍, 넌 이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가야 한다구. 한 순간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어선 안돼! 민홍은 뒤늦게 자리를 고쳐 앉으며 교수식당 내부를 둘러 보았다. 순간 남학생들과 선배가 내뿜고 있는 맥주의 주기(酒氣)와 담배연기가 비위를 뒤틀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민홍은 부아가 치밀었다. 남자 선배들과 함께 공부했을 여자 동문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싶어서였다. 남편과 자식때문에? 그렇다면 그들 자신의 인생은 어찌 된 거지? 하지만 때늦게 여자 선배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일! 나 하나만이라도 여성에 대한 여성에 의한 배신자의 대열에 기지 않는거다. 민홍은 마음을 다지며 여자친구들을 둘러 보았다. 한 두컵의 맥주에 여학생들의 얼굴 역시 발그스레 달아 올라 있었다. 모두 예뻤다. 그러나 여자라는 성(性)의 핸디캡을 안은 채 취업전선에서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인지라 그들 역시 긴장된 얼굴로 선배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백일홍! 백일홍이 피었습니다아! 이봐요!

“취업하려면 말이요. 시사(時事)문제, 예를 들자면 9월 29일자로 북한측이 보낸 쌀 시멘트 등의 수해물자를 인수했던 한국 정부가 지난 11월 15일 일차 남북한 경제회담을 개최한데 뒤이어… 그리고 지난 10월 6일에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된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과 미국의 보수주의로의 회귀에 대해서도…”

취업상식을 되뇌이고 있는 노선배를 향해서 웃어 준 민홍은 숄더 백을 열었다. 영어 회화교본이라도 뽑아드는것이 선배 퇴치책이 되어줄 성 싶었다. 그제서야 선배는 요란스러운 의자소리와 함께 다른 여자 후배 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잘되었다 싶었다. 그녀는 회화 교본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우드 유 두 미 어 훼이버? (Would you dome a favor?) 부탁 드릴 게 있는데요?’라는 의미를 지닌 문장위에서 어른대는 것은 조금 전 만났던 심 교수의 그늘진 표정이었다. 백군, 정말 딱하게 되었는네. 우리 연구소측의 결정 말이지 미안하게 되었어.

한시간 전 연구소측의 현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심 교수의 위로가 길어질수록 민홍은 높디 높은 여성 취업의 벽을 실감해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여자에 비해서 훨씬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두터운 사회통념을 깰수 없다는 데 더욱 무력감을 느꼈다. 민홍은 노(老)교수의 위로를 망각할 양으로 다시금 회화책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영어 철자위에 내려 앉는 것은 홀어머니의 주름진 눈초리와 가쁜 숨결이었을 뿐이었다. 수유리 시장통에서 헌옷 수선일로 생계를 꾸려가며 지금껏 외동딸을 키워오느라 재봉틀을 돌려온 어머니의 빛바랜 안색과 청색(靑色)이 도는 입술을 뇌리에 떠올리자 민홍은 가슴이 미어졌다. 어느새

‘교수지망생’과 ‘헌옷 수선집딸’이라는 그녀의 상반된 실체가 모순(矛盾)이라는 어휘처럼 서로 서로 창과 방패를 들이대면서 호된 쌈박질을 했다. 두통과 사랑니의 통증에 시달리면서 시끌벅적한 간담회 자리를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마이크를 통해서 들려왔다.

“이젠 사사로운 얘기는 뒤로 미루시고 저를 주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맑은 저음(低音)이기에 감상적(感傷的)으로 들리는 사회자의 음성이 민홍의 귀에 생수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낭패감을 떨칠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한 기대감 탓일가? 민홍은 목소리의 주인을 주시했다. 김성직(金聖稷)이었다. 작년 삼학년 가을 학기에 제대한 뒤 복학했던 삼사년 정도의 선배요 과대표로도 일하고 있는 그는 베이지색 낡은 진바지와 같은 색의 두툼한 털스웨터를 받쳐 입은채 얕으막한 단상에 서 있었다. 민홍은 삐죽 웃고야 말았다. 거치른 뜨게질로 가슴부위가 때워져 있는 촌티나는 그의 스웨터때문이었다. 아마도 그에 대한 어떤 기대감은 그의 노모가 때워주었을 구멍난 스웨터를 입어내는 스스럼 없는 그의 성격에 대한 친밀감의 산물일 터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김성직을 다시금 주시했다.

“자, 지금부터 사회학과 동계(冬季) 선후배 간담회를 시작 하겠습니다.”

재기발랄한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마키니’(막힌이)로 세상사에 달통한 듯 거드름을 피우는 복학생들 사이에서는 ‘말보루’(우리들의 마지막 보루)로 더 잘 통하는 김성직이 선후배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아니! ‘건배’를 외쳤던 조금 전에 우리 모임은 정식으로 시작된 것아냐? 오랫만에 학생 기분과 맥주에 한껏 취해 있는 선배들이 너스레를 떨자 간담회는 다시금 ‘건배’와 폭소로 이어졌다.

민홍은 진로와 같은 중대사는 상담(相談) 따위로 결판 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사교장으로 변한 이 자리를 위해서 그가 신선한 대안을 제시해 주기를 고대하면서 그를 주시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황황히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의 시선 속에 배어 도는 훈기 탓인듯 그녀의 응어리진 감정이 훈기로 풀어지면서 그녀의 가슴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자, 이제 후배들을 위해서 후원금을 쾌척해 주신 선배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탠포드에서 학위를 받으신 뒤 모교 부교수로 재직중이시며 동창회 총무로 계시는 오학연 선배님, 부친이 창업하신 기업체에서 현재 경영 수업을 받고 계시는 사업가이신 강한성 선배님.”

선배들이 간략하게 충고성 발언을 시작하자 민홍은 그들의 발언을 경청했다.

“일생동안 추구하고 싶은 직업 내지는 진로를 발견했다면 후배들은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예요. 일단 그 길로 매진하기만 한다면 성공은 뒤따를 테니까.”

일찌기 학자로 나섰던 오학연 선배가 진로 선택의 시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사건과 진실의 핵심에 다가서고 싶은 기자 지망생은 나를 찾아주십쇼.”

○일보 사회부의 해결사로 통한다는 양진석 선배에게 후배들이 열광했다.

“한남자가 있었어요. 그는17세, 22세와 29세에 각기 말라리아에, 19세에는 천연두에, 20세때는 늑막염에 그리고 35세때는 급성 이질에 걸려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43세에는 치아가 거의 다 손상되는 병고를 치뤘으나 43세인 1775년에 미국혁명군의 사령관이 된 그는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업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업적으로 국민적 영웅이되었고 12년 후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죠. 67세로 세상을 뜬 ‘조지워싱턴’대통령이 바로 그 사람이죠. 후배 여러분! 꺾일 줄 모르는 삶의 의지와 꿈은 한 인간에게 병고와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생명력과 능력을 공급 해 준답니다.”

학창시절 가난탓에 사시장철 바바리코트 하나로 버텼기에 ‘바바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명판사 이명철 선배가 뼈있는 충고로 발언순서를 완결했다.

“이제는 후배들의 얘기를 들어 봅시다. 질의와 답변 형식이 좋겠어요.”

김성직은 오학연 선배의 제안대로 봅신을 먼저 소개했다. 복학생으로서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밝힌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미희에게 마이크를 넘겨 주었다. 미희는 화사하고 우아한 차림을 뽐내며 일어섰다.

“저는 앵커우먼 지망생인 윤미흰데요. 언론계 선배님들의 성원 부탁드립니다.”

“앵커우먼도 좋지만 대단한 미인인데. 그래 시집은 안갈거요?”

“물론 근사한 남자를 만나면 결혼도 해야겠죠.”

어유. 미모도 많고 욕심도 많네. 많은 건 미덕이죠. 윤미희 역시 선배들의 농담을 맞받아 치며 자리에 앉았다. 저는 외교관 지망생인 김진숙입니다. 아니! 외교관에게 시집이나 갈 일이지 웬고생을 사서 하는거요. 예의 김한근 선배가 김진숙의 야심을 깔아뭉개자 남자들이 와르르 폭소를 터뜨렸다. 민홍은 남자 선배들이 드러내는 여학생에 대한 편견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니. 요즈음에는 성적 대신 미모로 여학생들을 뽑나. 와들 예쁘노.”

“본말이 전도된 모임에 당혹해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제 소개를 대신하죠.”

그녀의 발언이 찬물을 끼얹은 듯 잔치 자리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봐. 후배. 중간 선배가 주는 고언이니 새겨들어요. 후배가 왜 지금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는지 이윤 모르겠지만 후배의 엉뚱한 발언말이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인기 전략치고는 아주 졸렬했어요. 사과하세요. 당장!”

흡사 철옹성을 연상시켰던 이름에 걸맞는 당당한 풍채를 지닌 젊은 선배가 민홍을 지목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남녀의 대치에 모임의 열기는 얼어붙었다.

 <다음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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