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 자연과의 합일 이룬 한마당
홍신자를 비롯, 몽골예술단, 덴마크의 키티 존슨, 일본의 노부끼 소이치로 등 공연

왠지 기다려지던 죽산 예술제.

6월5일아침. 줄기차게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갈까, 말까, 동숭동이라면 미련없이 우산을 받쳐들고 다녀올텐데…

예정대로 행사가 진행되니 안심하고 오라는 전화 응답을 끝으로 갈등을 끝냈다. 그래, 가보자. 어떤돌이 웃는돌인지 보고 오자.

개막식을 장식하기로 되어있던 안숙선씨가 공연을 펑크냈다. 비디오 아트 역시 납득할만한 해명없이 주최측의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초장부터 화가 치밀었다. 달려온 먼 길도 길이려니와 공연을 보러온 그 많은 관객의 시간을 앗아가는 공연자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공연 펑크는 그 어떤 이유도 통할 수 없다. 지리멸렬한 인간 사회를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이 예술이고 그 표현이 공연으로, 그리고 공연은 또다른 집단과의 약속이니까.

여기저기 보이는 진흙집과 파오와 나무, 그리고 돌들이 미소를 보낸다. 진정하라고. 그래! 자연이 다가서는데 이 미물인들 어찌하랴.

막연히 지녔던 징기스칸에 대한 환상이 몽골 예술단의 첫날 공연으로 인하여 성급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기획이나 재정상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뭔가 초라하다는 느낌과 독주나 독무로 일관하기 보다는 집단 공연으로 행해졌더라면 대국의 문화를 더욱 풍요하게 접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공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통음악인 흐미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발성법의 최고봉을 장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만큼 묘한 여운을 남겼다.

첫날과 마지막날에 보았던 덴마크 안무가 키티 존슨의 무대는 그야말로 환상의 무대였다. 자연과 인간과 예술과 메카니즘이 뒤엉켜 이루어내는 감격과 정화의 감정은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의 육체와 정신과 열정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마치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아름다운 인간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춤과 더불어 김기인씨의 ‘마음의 빛’이라는 작품 역시 훌륭한 생명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기호는 마치 양식화된 동남아 무용에서 느낄수 있는 상상력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마지막 날에 보았던 일본의 노부끼 소이치로씨의 비디오 아트는 무척 흥미로운 작품 구성으로 인하여 관객의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했던 작품이었다. 영상을 통한 사랑 보기와 살아 움직이는 사랑 보기, 그리고 피어오름과 꺼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조화를 맞볼 수 있었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홍신자 선생님의 피날레 공연에 대해서는 일절의 언급을 피하려 한다. 문외한이니까.

대체적으로 지불했던 입장료에 비해 볼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던 예술제였으나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 함께했던 예술제라는 점에 만족했고 식사해결이나 산뜻하지 못했던 진행상의 문제점들을 점차로 개선해 나간다면 해마다 열심히 찾아가보픈 예술제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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