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한복디자이너 이리자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09.25 15:18
  • 수정 2017-09-25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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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함 인간도리 몸소 보여준 부모님 가르침이 평생 지침
유년시절엔 충청도 사투리로‘별쭝맞다’소리들을 정도로 소문난 말괄량이

 

대학2학년때 황윤주(남편)씨와 함께. 약혼사진인 셈이다.
대학2학년때 황윤주(남편)씨와 함께. 약혼사진인 셈이다.
어머니와 관련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려서부터 속옷으로 색깔있는 옷을 입히지 않으셨다. 지금이야 날마다 샤워니 사우나니 하고 얼마든지 원하는 때 목욕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클 때만해도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자주 목욕을 한 셈인데, 머슴이 여물 솥에 물을 부어 한솥 끓여 놓으면 어머니가 큰 함지박에서 나를 늘 목욕을 시키셨다. 그때 목욕물이란 것이 보면 지푸라기 같은 게 둥둥 떠 다니는 그런 물이었다.

그렇게 목욕을 하고 나면 무명이든 뭐든 꼭 흰 옷을 갈아 입히셨다. 여자는 자기 몸을 깨끗이 청결하게 해야 성격이나 모든 품성이 그렇게 깨끗하고 단정하게 되며, 성격이란 성장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흰 옷은 때가 타서 더러워지면 금새 표가 나기 때문에 곧바로 갈아 입지 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속옷이 우중충한 걸 입다 보면 마음도 우중충해지고 정직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셨고, 청결하고 깔끔하고 정직하게 키우는 의미로 꼭 그렇게 흰옷을 입히신 것이었다.



돈독에 치여 죽은 이

예화로‘아량’가르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지만 그렇게 커서 그런지 나도 우리 아이들 삼남매 키우면서 걔들은 물론 남편과 나까지도 속옷은 언제든지 흰 옷만을 고집한다. 요사이 패션 바람인지가 불어서 팬티조차도 갖가지 색깔이 넘쳐나지만 한 번도 색깔있는 걸 입어 본 적이 없다. 어머니 영향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어머니는 굉장히 철저하셨다. 모든 사람들에게 앞서도 맏며느리답게 잘 베푸신다는 얘기를 했지만 어머니는 늘 얘기가, 사람이란게 본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잘살면 잘사는 사람답게 여러 사람을 풀어 먹이고, 못살아서 남의 밑에 가 일을 하면 또 그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정직하게 부지런하게 그 주인의 일을 해줘야 한다고 노상 말씀하셨다.

그런 소신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셨던 것 같다. 어렸을 땐데 아버지가 하신 얘기가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대전갑부로 김갑순이라는 이와 정일득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 두 사람 땅을 안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할 정도였다. 김갑순이는 조금 후세 사람이고, 정일득이는 조금 먼저 사람이다.

그런데 정일득이라는 이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 뒀냐 하면 쌀을 넣어 두는 곳간에 잔뜩 모아 놓았다. 옛날에는 금고가 없었을 뿐더러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었는지라 곳간에 돈을 쌓아 놓고는 혼자 들락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가 곳간에 들어갔다가 그만 거기서 죽어 버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돈 독에 취해서 죽었다고들 했다. 돈이 그렇게 독하다고 한다. 그 악취가. 여러 사람이 만진 돈이 곳간 가득 쌓였으니 아마 독해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늘 그 얘기를 우리 어머니하고 나한테 해주셨다. 돈이 그렇게 많으면, 더러 도둑질도 해야 없는 사람도 살고, 더러 훔쳐가도 되는 거 아니냐. 하다못해 곳간 지키는 사람이라도 하나 두었다면 그 사람 밥 벌게 하고, 자신은 안 죽고 했을 것을, 그걸 사람이 다 못 미더워가지고 자기 혼자 지키려다가 죽었다, 즉, 돈에 치여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량이 없이는 큰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이 욕심이 과하면 죽는다, 아버지는 늘 그 말씀을 하셨다. 잘살면 잘사는 사람답게 아랫 사람들 풀어먹일 줄도 알아야 되고, 남의 고용인으로 됐을 때는 그 사람에게 심복 부하가 돼 주고. 천하에 명장이란 것은 제가 잘나서 명장이 아니다, 부하 직원을 잘 둬야 부하가 명장을 만드는 거다, 그런 얘기를 하셨다. 부모님의 그런얘기들이 지금까지 내 삶의 참교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막내로 귀여움 독차지 여덟살까지 엄마 젖 못떼



막내인 데다가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란 탓에 나는 별쭝맞을 뿐더러 고집이 세고 어리광이 심했던 것 같다. 내가 뭐든 갖고 싶다 하면 부모님이 안 사주고 배기지를 못하셨고, 하고 싶다는 것을 안 해줘 보신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 돈이 귀한지 뭐가 귀한지를 모르고 컸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자주 일본을 왔다갔다 하셨는데, 그때마다 그 귀한 우단이라든지 뽀라천, 뽀라라고 와이셔츠도 만들어 입고 하는 그런 천이 있다, 같은 것도 많이 떠가지고 오셨다. 어머니가 워낙 바느질을 좋아하시고 잘하시니까 아마 어머니를 위해서 그런 옷감을 많이 떠오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귀한 우단 치마 저고리니 하는 것도 내가 어려서부터 입었다.

귀한 귤도 퍽 많이 먹었다. 할머니가 병이 나시니까 일본을 갔다오시면서 귤도 사오셨는데, 다른 사람은 한 쪽을 못 얻어 먹었어도 나는 몇쪽씩 주시곤 했다. 그런데도, 내가 여섯살쯤 됐을 땐데, 할머니 좀 얼른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내가 다 먹게, 그런 생각을 했으니, 그렇게 철부지였다.

좀 더 커서 해방 무렵, 육이오사변 때도 나는 남들 다 먹는 보리밥도 그렇게 많이 안 먹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쌀밥을 조금 하면 꼭 덜어서 나를 주셔서 나도 쌀밥을 먹었다. 그러니 우리 시대에 그렇게 고생들을 많이 해도 나는 별 고생한 기억이 없다.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기를 사실은 아홉 살에 들어갔다. 원래 여덟살에 들어갔는데, 너무 젖을 밝혀서 그만 계속 못 다녔다.

그 옛날에 막내니까 얼마나 오래 젖을 먹었겠는가. 여덟살에 학교를 들어갔는데 한 시간 공부하고 나면 젖 생각이 나서 목구멍이 간질거리고 안달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막 울면 선생님이 집에다 연락을 하시고, 그러면 집에서 누군가가 지게를 지고 와서는 나를 태우고 집에 갔다. 그렇게 집에 가면 어머니 가슴팍에 안겨 한참을 젖꼭지를 물고 있었다. 한 시간은 좋이됐을 것이다. 그러고 다시 학교를 가면 선생님이 오히려 더 있다가 보내라고 그럴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일학년을 두 번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기도 한 것이 그렇게 젖을 빨고 있으면 침이 나왔겠는가 뭐가 나왔겠는가. 그 젖이 진짜 나와서 내 목을 타고 넘어갔는지, 내 침이 괴어 넘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머니 젖을 여덟살까지도 그렇게 빨았다. 요즘 애기들이 입에다 꼭지 같은 거 하나씩 물고 있어야 성에 차듯 그렇게 어머니 젖을 물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던것 같다.

우스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남편하고 연애하던 시절에, 그때가 벌써 대학교 2학년 땐데, 나보고 혀 좀 내밀어 보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혀 짧은 소리를 하느냐고. 지금도 내가 사실은 발음이 남같이 딱딱 떨어지지를 못한다. 하도 어려서 그렇게 젖을 빨고 어리광을 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이 나이가 먹도록 발음이 정확하게 떨어지지를 못한다. 그게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배꼽잡은 초등학교 입학시험 좋은 성적으로 합격, 오전반에



일제 시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다. 두계국민학교였는데, 오전반, 오후반이 있어서, 시험 봐서 합격하면 오전반에 들어가고 떨어진 애들은 오후반으로 밀려나고, 그보다 더 못하면 그것도 못 들어갔고, 그랬다.

내가 시험을 치를 때 그때도 참 우스운 기억이 있다. 사촌들이 있고, 나이 차이는 많지만 언니와 우리 집에 양자로 들어온 오빠가 있어서 나는 얻어 듣는 게 꽤 많았다. 우리는 시골이라 그다지 일본말을 많이 안 쓰고 살았는데, 언니 오빠들이 일본말을 할 때면 말똥까라 소똥까라 부산똥까라네, 이런 말들을 그리 하는 것이었다.

시험을 치는데, 구두 시험이었다. 문제가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 전쟁을 어디에서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걸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어디에선가 들었던 기억은 있어서 코 큰 로서아하고 전쟁을 한다고 대답했다. 대답은 제대로 한 셈이었다. 그러니까 일본 말 좀 할 줄 아느냐고 물어왔다. 동네에서도 안 쓰지, 집에서도 안 쓰지, 하긴 뭘 했겠는가. 그래도 용기는 있어서, 말똥까라 소똥까라 부산똥까라네, 하고 커다랗게 외쳤다. 내딴에는 언니 오빠들 얘기를 귀담아 듣고 일본말을 잘한답시고 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거기에 있는 선생들이 막 배꼽을 빼고 웃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린아이가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했겠는가. 그만 그 자리에서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서는 막 울어댔다. 그래도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우리 향안리에서 나까지 딱 두 아이가 오전반으로 합격이 됐다.

그때는 동네들은 많고 학교는 멀어서 십리씩도, 어떤 데는 이십리도 다니고 했다. 학교에 갈 때는 사촌 언니들하고 양오빠도 있었는데, 오빠도 업고 다니고 언니도 업고 다니고 또 내가 걸어서도 다니고 그랬다. 그렇게 나를 학교에 데리고 가면 젖 먹고 싶다고 난리를 부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논의 새 보다 뱀에 물리고 우물에 빠지는 등 추억도 많아



 

여고시절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나간 나들이.
여고시절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나간 나들이.
‘별쭝맞다’는 말이 자주 나왔는데, 충청도 말로 말괄량이를 별쭝맞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어려서부터 말괄량이었다. 꼭 남자같아서 뽕나무니 감나무도 많이 오르내리고, 산을 헤집고 돌아 다니기도 잘했다. 동네 애들을 죽 끌고 다니면서 산에 머루니 다래를 따러 갔다가 옻이 올라서 닭 피도 발라 봤고, 부모님은 못하게 하셔도 추수 무렵이면 논에 가서 새를 보다가 뱀에 물리기도 했다. 내가 새를 보러 간 것은 사실은 그 새참이 너무 맛있어서였는데, 그만 새끼 손가락을 뱀에 물린 것이었다. 막 손을 휘저어 뱀은 떨어져 나갔지만 집 안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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