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뜨거!

민홍은 수압(水壓)으로 수온이 상승한 온수에서 화기(火氣)마저 느껴진 순간 잠시 빠져 들었던 지난 날의 여수(旅愁)에서 화들짝 깨어 났다. 그래,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곳은 없겠지.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냉큼 수도꼭지를 잠궜다. 고운 추억의 장(章) 속에서 아타바스카 폭포와 나눴던 신비한 교감을 잃어버린 아쉬움에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는 욕조 밖으로 나온 즉시 가운을 챙겨 입었다. 바로 그 때였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 것은. 언제부터 전화벨은 울렸던 것일까.

누구일까? 밤눈[夜雪]만이 소리없이 내리는 이 오밤 중에 나를 찾는 이는? 야심한 시각에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급한 사연으로 그녀를 찾는 통화자의 다급한 음성처럼 느껴졌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욱이 호젓한 주말을 망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머리를 스치자 민홍은 기이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어떡하지? 순간 민홍은충동적으로 욕실문으로 다가간 즉시 문고리를 그러쥐었다. 사람의 예측을 불허하는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불안감이 등을 떼밀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는 멈춰 섰다. 불현듯 젊은이가 휘갈겨 쓴 절묘한 문구가 생생히 뇌리에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다. 군에 입대한 아들을 둔 국문학과 김애숙 교수가 며칠 전 자랑스레 보여주었던 그 글발은 민홍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 저는 갓 시작한 병영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세면시간은 물론 화장실에 갈때에는 얼굴만 씻을 것인가 아니면 머리까지 감을 것인가를, 그리고 화장실에 갈 적에는 작은 일만 보고 나올 것인가 아니면 큰 일까지도 다 보고나올 것인가를 마음대로 선택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 취할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삶의 특권이요 축복인가를 군입대를 통해서야 역설적으로 배우고 있는 셈입니다.”

민홍은 청년의 글귀를 되새긴 순간 욕실문을 여며 닫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선택권을 최대치로 구가하고싶은 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지금껏 결코 그녀가 택하지 않았던 불가피한 삶의 선택에 끌려 다니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면서 부자유스럽고 피동적인 삶을 살아 왔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명실공히 성인으로서 삶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누리며 살고 있음을 그녀 자신에게라도 과시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벗은 즉시 욕조 속으로 되들어 선 다음 수도꼭지를 최대치로 틀어 올렸다. 따끈한 물이 욕조에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지는 목욕물에 전신을 내어맡긴 채 욕조에 누었다.

이제는 전화 벨소리도 그치고 아타바스카 폭포수의 굉음도 그녀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생애에 분명히 커다란 획을 그었을 노할머니와의 사연 많은 재회가 떠 안겨준 후련하면서도 착잡한 느낌은 물론이고 조금전 전화 벨소리에 잔뜩 곤두섰던 신경도 해면처럼 풀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아! 자족감을 하품으로 뿜어 내던 그녀는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올 한 해도 사흘 남짓 남아 있을 뿐인 지금 그녀가 정작 치켜 들어야 할 ‘좋은 노동’이 불시에 머리에 떠올랐던것이다. 지금껏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미뤄왔던 ‘좋은 노동’. 그 일은 과거의 굴곡진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이요, 그 고뇌의 쓴 맛을 되새기면서 그녀 자신과는 물론 그녀의 숙명과 참된 화해를 이루는 일이었다. 이는 또한 그녀의 생채기를 아물리는 치유의 길이요, 아울러 복된 미래를 세우기 위한 튼실한 기초(基礎)작업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욕조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내면 의식은 어느새 십이년 전의 겨울, 1984년 11월의 어느날을 향해서 팽팽하게 그 시위를 당겼다.

Ⅰ.만남의서곡

1984년.

한 해를 살아내기가 만만치 않았던 까닭에 사람들은 ‘1984년 그해 역시 다사다난한 한 해’였노라고 훗날 회고할 것이다. 유독 다수의 시민들에게 희비가 교차했던 한 해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해에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쁨의 환호성을 수없이 터뜨렸었다.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엘에이에서 열렸던 제23회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를 따냄으로써 종합 순위 10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자연의 재해와 아울러 정가(政街)를 휘몰아친 회오리에 탄식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그해 연초에 학원자율화 조치가 발표된 이래 대학가는 연일 학원민주화 데모, 학원 프락치 사건 그리고 서울대경찰 재투입사태에 이은 민정당사 농성사건으로 22명의 대학생이 구속되는 등의 진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에는 중부지방을 강타했던 수해가 무려 1백90명의 인명을 앗아가는 바람에 이 땅의 사람들은 또다시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어야만 했었다. 정가(政街)의 기상도 역시 신군부가 일으킨 정치 폭풍과 신한민주당의 창당이 자초한 정치 이변현상으로 한껏 흐리기만 했었다.

바로 그해 십일월 말의 토요일 오후였다.

민홍은 그날 북악을 치고 달려온 북풍만이 학생회관 건물의 외벽을 치고 달아날 뿐 적막감만이 감도는 학생회관 건물에 들어 섰다. 혹한에 얼얼해진 볼을 풀어볼 양으로 사탕을 먹은 아이 마냥 두볼을 움찔거리면서 그녀는 교수식당 출입문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잠시 호흡을 가누었다. 오버 코트의 후드에도 불구하고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말갈기처럼 찢겨진 긴 퍼머머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피해의식과 도피심리를 다스릴 양이었다. 허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회학과 졸업반인 그녀 반 학생 모두에게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주최하는 간담회에 참석하는 것이 필수 사항이라는 사실을. 이유는 간단했다. 공사로 다망한 선배들이 후배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서 마련해준 자리에 불참하는 것은 선배들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인 데다가 취업을 원하는 재학생들에게 이 같은 자리는 그들이 앞장서서 찾아나서야 할 계제여서 더욱 그랬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린 민홍은 조심스레 식당 안으로 들어 섰다. 민홍은 주춤 멈춰 섰다. 광주항쟁 이후 경색일로를 치닫고 있는 얼어붙은 정국(政局)의 냉기와는 달리 젊은이 특유의 열정과 홍소(哄笑)로 후꾼 달아오른식당안의 공기가 뜨거운 열기마냥 순식간에 그녀의 숨길을 막았던 까닭이었다. 윤미희(尹美姬)가 친구를 향해서 손짓했다.

“얘! 민홍아, 이리로와, 어서!”

그러나 민홍은 억지로나마 웃어 보이고는 출입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지금 한 시간 전에 통보받았던 궂은 소식이 안겨준 충격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이즈음에는 지병인 심장질환이 도진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의 가쁜 숨결을 뒤로 한 채 학교로 왔건만 사회학과 과장이요 학교 부설 사회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심우석 교수가 들려준 소식은 그녀가 사회학 연구소 간사직 임용시험에 불합격했다는 궂은 소식이었을 따름이었다.

하필이면 종강 날짜에 맞춰서 낙방소식이 날아올게 뭐람! 이는 마치 16년동안 계속했던 그녀의 학창생활이 패배로 끝났음을 선언해주는 최후 통첩처럼 여겨졌기에 민홍은 더욱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학과 성적이 그녀보다 뒤지는 남학생이 간사로 합격했다는 소식에 대한 상대적인 패배감은 차치하고서라도 간사직 불합격은 그녀의 진로에 엄청난 차질이 생겼음을 뜻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녀는 졸업 직후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꿈꿨던 학자지망생이었다.

“사실 성적이 우수한 자네를 불합격시켜야 했던 연구소측의 사정을 양해해 주게나. 내년 여름 우리연구소는 세계 사회학 세미나를 주관하지 않나. 헌데 현재 임신중인 김미애 간사는 세미나가 열릴 즈음에 출산할 예정이니….”

민홍은 연구소측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닌 여성인력에 대한 이유있는 편견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 같은 선입견을 조장한 데에는 일부 한국 여성들의 무책임한 작업 태도가 한몫 거들었음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측의 결정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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